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혼밥은 이미 익숙해졌지만, 혼밥을 하는 다른 사람을 보면 괜시리 기쁜 건 여전하다. 혹여나 서로 통해서 말을 걸지 않을까, 그래서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지만 우리는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막상 누가 와서 말을 걸면 어버버, 하다가 도망갈 거 같다. 혼자 여행을 간 사람들에게는 각자만의 계획이 있기 마련이니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다. 다른 테이블에서 각자 혼밥하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스쳐가기, 걸음 속도를 조절하여 나란히 걷지 않기, 혼자 온 사람들끼리 바테이블 나눠쓰기와 같은 것들 말이다. 오늘은 평대리를 여행하면서 마주친 혼여행족들에 대한 이야기다.
만약 제주도 동쪽을 뚜벅이로 여행한 적이 있다면 파란버스 201번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201번은 제주도민을 포함하여 뚜벅이 여행자들을 싣고 동쪽 전역을 쏘다닌다. 한적한 버스는 사실 혼여행족에게 가장 마음이 편한 곳이다. 무선이어폰을 귀에 꽂고서 창밖의 제주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금방 간다. 평대리까지 버스로 48분을 달려야했다. 그동안 블로그에 맛집 포스팅을 하거나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눈 깜박할 새에 금세 지나치고야 말았다. 버스는 아무 생각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 아닐까.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도 없고(코로나라 더욱 그런 거 같다.), 자리가 부족한 게 아닌 이상 괜히 내 옆에 앉으려 들지도 않고, 풍경은 시시각각 변해서 볼거리가 넘쳐나니까. 그리고 혼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장소다.
버스에 오르면 좌우로 눈을 훑으며 자리가 있나 찾게 된다. 그러면서 누가 탔는지도 덩달아 보이게 되는데, 혼여행족을 이때 많이 보게 된다. 제주도민과 여행자들은 옷부터가 다르다. 여자 여행자의 경우 긴치마를 입고, 색색의 니트를 입고, 숏패딩을 걸쳐입은 그들에게는 어딘가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아무리 추워도 롱패딩을 입지 않는다. 숏패딩, 최대한 제주스럽게 꾸민 패션들. 여행자가 지니고 있는 간지다. 여행자 곁에는 캐리어 하나씩 달려있다. 다들 숙소를 옮기러 가는지, 아니면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인건지.
한 버스 정류장에서 한 여행객이 캐리어를 들고 탑승하려고 했다. 버스 안에 사람도 많아 좌석이 얼마 없었기에 기사님이 여행객을 멈춰세웠다. "어디로 가려고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했는지 여행자는 머뭇거리면서 "세화요..."하고 답했다. "멀리 가는데 캐리어 넣고 오세요!"하며 다소 짓궂은 목소리지만 친근하게 버스 기사님이 말했다. 그는 캐리어를 짐칸에 넣고서 버스에 탔다. 당신은 세화 버스정류장으로 가는군요. 나는 평대리로 가는데. 누군가의 행선지를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약간의 내적친밀감이 생긴다고 말하면, 나를 이상하게 볼까. 그 사람은 세화에서 어떤 여행을 보낼지 궁금해졌다. 나도 다음에는 세화에 들려야지.
'톰톰카레'는 17년도 제주도 여행을 할 때부터 가고 싶었던 장소였다. 동선이 맞지 않아 코스에 넣지 못했고, 그뒤로도 갈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제주도 계획을 세우면서 다시금 추천을 받았기에 이 틈을 타서 가보기로 결심했다. 사실 한 시간에 걸쳐 평대리에 간 이유도 바로 이 식당때문이었다. 비건 카레집인데 콩카레, 시금치카레, 버섯카레 등 다양하다. 나는 반반카레로 해서 콩카레와 시금치카레를 시켰다. 콩을 싫어해서 걱정했지만 카레에서 콩 맛은 전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우면서도 인도식 카레의 향이 느껴져 더욱 맛있게 먹었다. (건더기로 나온 콩은 먹지 않았지만...)
가게는 아담한 편이었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6인 테이블 하나, 4인 테이블 3개, 그리고 2인 테이블 하나였다. 혼자서 4인 테이블 자리에 앉는 건 아직도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하지만 곧 들어오는 사람들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다. 들어오는 사람마다 혼여행족이었다. 혼밥의 성지로 여기가 유명해지기라도 한 건가? 아마도 평대리 지역 자체가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조용한 마을이다보니, 혼자 여행 온 사람이 많아서 혼밥러 역시 많은 거 같았다. (오로지 나의 뇌피셜이다.)
이렇게나 혼밥이 많은 식당은 이제까지 처음이었다. 심지어 혼밥 테이블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는데도. 혼자 밥 먹는 사람이 많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일이었구나. 사장님도 혼밥인 사람들을 배려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혼여행족 한 명이 불편한 2인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4인 테이블 자리가 비자마자 이쪽으로 자리를 옮기라며 안내했다. 나중에 단체 손님이 올 때는 자리가 없을 텐데도 말이었다.
사장님들의 눈빛을 보면 혼밥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눈빛은 '그렇구나'하고 흘려보내는 것이다. 특별하지도, 특이하지도 않은, 그저 여행객 한 명으로서만 바라보는 그 눈빛이 나를 편하게 만든다.
평대리 해안가를 따라서 걸어서 15분 걸리는 카페를 가기로 했다. '르토아베이스먼트'로, 네이버에 검색하니 혼자 온 사람들이 많은 카페라고 했다. (막상 가보니까 인스타 카페로 등록이 되기라도 한 건지,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평대리의 바다는 내가 지금껏 본 제주의 바다 중에서 가장 투명하다. 특히 현무암으로 구역이 나뉘어져 있어서 잔잔하고 얕게 퍼져있는 부분이 있고, 뒤편으로는 파도가 하얗게 일어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잔잔한 물결을 보면서도 시원스런 파도 소리를 같이 즐길 수 있다는 게 평대리의 매력이었다.
나는 아예 해변까지 내려가지 않고, 해안가를 따라 걸어가면서 해변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중에도 혼여행족이 있었다. 무늬가 있는 긴 치마를 입고서 DSLR을 목에 걸고 있었다. 저분도 여행을 왔나보다, 하면서 지나치려고 했는데 해변에서 막 올라오던 그녀와 마주치고 말았다. 이때부터 나란히 걷는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그분은 나보다 걸음이 더 빨랐다. 일부러 빨리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중간중간 멈춰서서 사진을 찍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그분을 따라잡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나란히 가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애썼다. (사실 나만 의식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서로 일행처럼 보이면 좀 민망하지 않은가. 차라리 한 명이 아니라 친구랑 여행을 온 사람이었으면 덜 신경쓰였을텐데. 혼자+혼자의 조합은 민망함을 자아냈다. 언젠가 동선이 달라지겠지 싶어 열심히 걸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가 가려던 카페에 들어가는 거였다.
내가 먼저 걸을 걸 그랬나? 얼떨결에 저 사람을 따라 들어간 것처럼 보여서 미묘했다. 서성거리며 저 사람이 먼저 주문하기를 기다려야하나, 싶었는데 굳이 그럴 것도 없었다. 당당하게 들어갔는데 하필이면 주문이 밀린 타이밍이라 그 분과 딱 마주쳤다. 커피가 좀 늦게 나와서 그분과 내가 옆에서 같이 기다렸다. 다행히 자리는 아예 다른 방으로 잡아서 마주치지 않았다.
여기가 유명한 카페인 걸로 하자.
조금 어색한, 동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