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일기 3 : 초고를 네 번이나 엎었다
초고를 네 번이나 엎었다. 네번째를 써야할 때가 되었을 때 브런치를 열어서 나의 이 심각한 사태를 기록하려고 한다. 정말 이대로 엎어도 되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첫문장에서 주춤하고는 하는데 그럴 때마다 글쓰기 코치 책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그럼 두 번째 문장부터 써라!"
처음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쓰지 못하는 쪽이 더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글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내게 조언을 구하는데, 내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처음 쓴 초고는 그냥 버린다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써." 그렇다. 초고는 버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완성도 채 못한 소설을 네 번이나 갈아엎게 되니 마음이 좀 쓰리다.
초고를 쓸 땐 자동기술(모든 생각을 버리고 손가락이 가는대로 쓰는 기법)로 쓴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손으로만 써야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거다. 한숨을 쉬듯이 일단 내질러보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손가락으로 내뱉어본다면 무언가 또렷하게 보이는 게 있다.
물론 문장은 망했지만.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니 문장이 제대로 될리가 만무하다. 똑같은 단어를 여러 번 쓰고, 주어와 동사 허용이 맞지 않는다. 오타도 몇 문장 있지만 절대 고치지 않는다. 문장을 완벽하게 쓰려고 하면 초고를 완성하지 못한다. 초고는 일단 스피드가 생명이다. '쓰고 싶다'는 감정이 들 때 당장 앉아서 최대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해야한다. 중간에 멈추면, 나처럼 초고를 네 번이나 갈아엎게 된다. 이 소설은 망했어! 하면서.
초고를 어쩌다가 네 번이나 갈아엎게 되었을까? 나는 한 번 바꾸려면 도마뱀이 허물 벗듯이 모든 걸 내던져버리는 습관이 있다. 초고를 두 번째 쓰는 것도 백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아예 첫 장면부터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버스에서 시작을 했다면, 이번에는 앞장면을 생략해서 장례식장부터 시작한다. 첫장면을 쓰다가 멈추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바로 그 생각. 아씁. 너무 재미가 없는데? 앞으로 굴러도, 뒤로 굴러도, 옆돌기를 하면서 봐도 정말 너무 재미가 없는데? 이건 다 써도 퇴고할 가치가 없겠어. 이러면서 또 빈 문서를 켠다.
그러면 이제 본질적인 고민이 드는 거다. 이 소설 소재 자체가 재미없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건 오산이다. 이미 많은 소설이 나온 지금, '무엇을' 쓰느냐보다는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나만의 방식대로 재미있게 쓰면 된다는 거다. 그말은 즉슨 정말 재미있는 소재를 가져와도 내가 재미없게 쓰면 망한다는 거지. 같은 경험을 했는데도 나는 "어디 갔다왔어. 좋더라."로 끝난다면 입담이 좋은 친구는 "내가 거기에 ~~~한 이유로 갔는데, 거기서 ~~~를 만나서, ~~~를 하고"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썰을 풀어내는 거였다. 경험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한 거였다.
그러면 또 두 번째 본질적인 고민이 들 것이다. 나는 재능이 없는 걸까...?
소설에서의 재능은 무엇일까? 초고 얘기를 하다가 소설 재능까지 말하는 나의 이 연결성에 감탄하면서 고민을 해본다. 빨리 성공하는 사람은 소설에 재능이 있는 사람일 거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쓰는 사람'이 결국 작가이다. 빨리 성공하고, 빨리 접해버리면 그만큼 질릴 수밖에 없게 되어있다. (글을 사랑하는 몇몇 작가들은 그렇지 않은 거 같지만.) 그러니 마지막까지 쓴다는 마음가짐으로 꾸준히 키보드를 붙잡으면 된다.
나는 오늘도 키보드를 붙잡는다. 이제 네 번째 초고를 쓰기 위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재미 없는 소재인 거 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저 재능이 없는 거 같지만. 애써 그런 마음을 버려두고 자동기술로 쭉쭉 써내려간다. 커다란 목표는 세우지 않았다. 그저 초고를 완성하는 걸 목표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