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헹궈내는 과정이다
일주일만에 빨래를 다시 했다. 이제는 더 쓸 수건이 없어서였다. 손 닦는 수건 한 장으로는 버틸 수가 없어서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수건을 모아 공용 세탁기에다가 와르르 쏟아냈다. 원래 같았으면 세제를 컵에 덜어내어 조금만 했을텐데, 조절 할 수 있다고 과신해버렸다. 세제를 통채로 부어버렸는데 덜어낼 방법은 없어서 시작하기를 눌렀다. 역시나 세탁이 끝났을 땐 수건에 세제가 끈적하게 남아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세탁기를 쓰기 어려워 손빨래를 해봤다. 손의 힘은 약했고, 세면대의 고인 물로 투명한 비누 기름이 둥둥 떠올랐다. 빨래를 쥐어짜는데 떨어지는 물줄기가 발등에 튀었다. 아무래도 다시 세탁을 해야겠구나.
날씨가 흐린 탓에 집에만 있었다. 다른 이유를 대자면 재정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일주일 내내 놀러다니는 체력을 키우지 않은 탓이었다. 그렇다고 체력이 넘쳐나더라도 오늘 같은 날은 바깥에 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 혼자 틀어박혀 있으면 이곳이 제주인지, 서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작은 원룸의 공간에 잔잔한 팝송을 틀고 있으면, 나는 올해도 독립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적당한 심심함과 옅은 외로움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재료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만큼, 혼자 잘 살 수 있기도 하면 좋을텐데. 자취 경력과 집안일을 잘 하는 능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근 2년 반 정도 자취를 했다. 나름 요리를 몇 번 해먹은 거 같은데 실력은 영 늘지 않는다. 내가 한 밥보다 편의점에서 산 떡볶이와 비빔면, 냉동 만두가 더 맛있었다. 어쩔 수 없이 하는 것과 더 잘 살고 싶어서 하는 건 다른 법이니까. 그러니까 집안을 잘 정리하고, 설거지를 제때하고, 요리를 성실하게 한다는 것. 그런 건 더 나은 삶을 잘 살고 싶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게 아닐까. 혼자 살 때 가장 중요한 건 '나에게 대접하기'라고 한다. 나를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성심성의껏 요리도, 청소도 해야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어차피 나에게 하는 건데 상관없지, 라는 마음이라면 금세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어제 세탁을 실패한 수건을 다시 빨러 갔다. 공용 세탁기에 넣어 헹굼버튼을 눌렀다. 빠르게 돌아가는 통돌이 세탁기를 보며, 남은 세제 탓에 찐득거리는 손의 감촉을 느꼈다. 설거지를 할 때도 세제를 잘 닦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잘 닦아낸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 세제의 몇 프로를 먹게 된다는 글을 어디선가 보았다. 아무리 씻어내도 결국 남아있는 것들이 도처에 있다. 헹궈낼래야 헹궈낼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잔여감은 살아가면서 씻겨내지 못할 거였다.
잔여감의 정체는 명확하지 않다. 어제의 것과 한 달 전의 것과 혹은 십 년 전의 것들이 얽혀서 덩어리를 만들어낸다. 울컥 쏟아지는 서운함이나 그리움. 죄책감이나 후회. 찌든 때와 같은 것들은 여전히 마음에 달라 붙어 있다.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되는 문제들과, 생각해봤자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여행을 하다보면 그런 잔여감의 실체가 표면 위로 기름처럼 떠오른다. 비눗방울 같은 색깔이다. 차라리 터져버렸으면 하는 이야기들이다.
생각이 많은 건 썩 좋은 일이 아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따라가다보면, 결국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차라리 일차원적으로 살고 싶기도 했다. 쉽게 씻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을 텐데. 걱정거리가 생겨도 고개를 휙휙 저으며 "어쩔 수 없지"하고 말하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그런 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겉으로는 "어쩔 수 없지"라며 쿨한 척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여러 번이나 곱씹는 사람. 최근에서야 내가 뒤끝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했다. 인정하기까지 몇 년이나 걸린 셈이었다.
여행은 헹굼의 과정이다. 마음에 달라붙은 먼지들을 헹궈낸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것들을 다시 헹궈내려고 우리는 계속 여행을 꿈꾸고 있다. 한 달로 충분히 헹궈지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할 거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묻은 세제와 먼지들이 씻겨나가려고 몇 번의 여행이, 며칠의 행복이 더해져야 하는지. 여행에서 돌아오면 다시 먼지가 묻을 거고, 심하면 커피 얼룩이 생길 수도 있다. 옷에 묻어도 "빨면 되지, 뭐"하면서 간단하게 넘기는 것처럼, 마음에도 그런 여유가 있을 수 있다면. 괜찮아. 다시 세탁하면 되지.
여행이 끝나 그간 머금없던 물기를 쫙 빼낸 후에는, 우리가 조금은 말라있을 수 있을까. 빳빳하게 펴진 수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