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유형의 흔한 제주도 여행기
계획적인 사람이고 싶다는 열망은 게으름뱅이 P형으로서 오래된 숙명이었다. 나를 거쳐간 플래너가 수십가지였다. 간단한 체크리스트를 쓰다가, 먼슬리로 한 눈에 보이게 정리하고, 위클리가 편할 거 같다고 생각하다가, 더 자세하게 적고 싶어서 데일리로 바꿨다. 심지어는 데일리리포트마저 작성한 적이 있다. 각 시간마다 내가 뭘 했는지 적는거다. 내가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하는지 볼 수 있는 템플릿이다. 이런 템플릿을 적절하게 활용했다면 시간관리 강사로 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은 결국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게 되었다.
정말 많은 유튜버와 자기계발서를 보았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시간관리 방법을 나열해서 글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무엇이든 책으로만 배우면 안 좋다고 하지. 내가 딱 그꼴이다. 주구장창 시간관리 방법에 대한 유튜브를 봐서 뭐하냐고. 할 일을 미루고서 유튜브를 보고 있는데. 자책을 하면서 침대에 눕는 건 또 포기할 수가 없다. 결국 "나도 모르겠다"하면서 포기하고 알고리즘에 항복한다. 이래서 기술이 발달하면 안 되는 거다. 인간을 지배하는 세계가 곧 찾아올 거 같다.
친구들 중에 계획적인 사람을 보면 신기하다. 한 번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나 : 만약에 갑자기 바다 가고 싶다고 나오라고 하면 어떨 거 같아?
친구 J : 한 시간 전에라도 말해주면 갑자기 바다에 간다는 계획을 세우지.
동네 친구인 J씨에게 종종 하루 전에 "내일 만날래?"하고 연락했던 게 떠올랐다. 나치고는 전날에 말한 거면 일찍 말해준 거나 다름 없다. 당일에 심심하고, 할 일이 없다가 삘이 꽂히면 금방 나간다. 한창 인턴 일을 할 때, 나랑 마찬가지로 회사 다니는 친한 언니와 카톡을 하다가 "오늘 닭발 땡긴다"하면 "고?"하면서 만나는 약속을 바로 잡게 된다. 나는 오래 전에 약속을 하면 다양한 이유로 깨지고, 번개로 만나야만 만날 수 있는 타입이다. 이런 갑작스런 일상의 변화가 즐겁다.
오늘은 집에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계획이었다. (물론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있는 식재료로 대충 때워야했다. 어제 점심은 비빔면과 군만두, 저녁은 대충 남은 밥과 반찬, 오늘 점심은 라면이었다. 이제 남은 저녁을 고민하던 중에 서러운 마음이 폭발했다. 나름 열심히 글도 썼고(원고지 20매밖에 안된다), 돈을 아껴가며 밥도 해먹었는데(과자와 음료수를 포함해 어제 편의점에서 이만원을 썼다) 왜 나는 집에서 처량하게 해먹어야 하는가! 한달살기를 시작할 때 사둔 쌀 4KG이 반절이나 넘게 남아있는데도 밖에서 먹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것도 이제껏 먹은 것 중에 가장 비싼 걸로 말이다. 바로 회였다.
당장 근처에 횟집이 있는지 찾아보았고, 마침 1인 세트를 파는 집이 버스로 15분 걸려서 왔고, 10분 뒤에 버스가 도착한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옷을 갈아입었다. 예의상 고데기를 하다가 말았다. 헐레벌떡 버스 정류장까지 왔는데 현타가 왔다. 1인 모둠회 4만원이나 되는데, 갑자기 이렇게 먹어도 되는 걸까?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하고 싶은 거 해~" 맞다.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 회를 사서 먹었다. 회와 청화와 재미있는 드라마. 이 세 가지면 정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느껴져서 행복감을 느꼈다.
이토록 무계획적이고, 충동적일 수 있다는 게 또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사실 다음주 계획을 주구장창 세우다가 골머리를 앓았다. 제주도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면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오름을 가고 싶은데 뚜벅이로는 너무 힘들 거 같아서 괜찮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거리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냥 내게 여러가지 선택지를 주기로 했다. 하나의 선택지로 만족하기엔 그릇이 너무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결론적으론 내일 계획이 아직 없다. 갑자기 또 회가 먹고 싶다면 오밤중에 뛰쳐나오면 되는 거니까.
즉흥적이고 충동적이게 사는 삶을 고치려들지 말고 인정하자. 어쩌면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
때론 계획도 없이 충동적이게 밤중에 회를 사와, 느닷없는 행복을 지닐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