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잔, 세화 샘플러 체험기
매거진 이름을 '제주 한 잔'으로 지은 데에는 다 뜻이 있다. 제주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제주 전통주, 혹은 혼술을 하러 가고 싶은 마음으로 그렇게 지은 거였다. 술 한 잔을 걸친 채 쓰는 글이라니 얼마나 달달할까. 그러나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혼술을 하려면 번화가에 숙소를 잡아야 했다는 거였고, 또 하나는 혼술을 하기에는 내가 낯을 가리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내향적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이름만 '한 잔'인 채로 끝나버렸는데, 그런 내게 <제주 한 잔>이라는 간판이 딱 눈에 보였다.
이름부터 짐작할 수 있겠지만 술을 파는 가게였다. 창문 너머로 볼 때에는 제주 전통술을 사는 기념품샵으로만 보였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앉을 수 있도록 의자와 테이블을 배치해두었더라. 환한 낮에 가서 그런지 기념품샵의 분위기가 더 강해 술을 거나하게 마실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제주 전통술 5종 샘플러'라는 배너가 눈에 띄고 만 거였다. 환한 대낮, 사람이 없는 기념품샵 같은 바, 거기서 혼술? 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마시고 싶다는 욕망과 혼술낮술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충돌하는 가운데 점원이 내게 쐐기를 박듯 말했다. "필요하신 거 있으면 불러주세요." 점원이 그런 말을 하면 오히려 소심하게 "네에..."하고 대답한 후 가게를 뛰쳐나가고 마는 성향이었다. 가게에 나가자마자 어떤 생각이 날 스쳐지나갔다. 운명과도 같은 <제주 한 잔>과의 만남을 이대로 보내면 분명 후회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당당하게 다시 들어가서 말했다. "샘플러 주세요!"
오메기술
#청와대추석선물
목넘김이 깔끔하다. 도수가 높은 편이 아닌데도 목을 타고 내려오는 감각이 느껴진다. 첫술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청하와 맛이 비슷한데 청하는 달달함이 있다면, 오메기술은 고소함이 느껴진다. 담백하고 깔끔해서 남녀노소 불호없이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술이다. 괜히 청와대추석선물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린 게 아니다. 알코올 특유의 쓴 맛이 느껴지긴 하는데, 화학적인 맛보다는 청량한 증류수의 맛이다.
같이 나온 안주 샘플러는 '필렛햄'이다. 직접 따뜻하게 뎁혀주었는지 한 입 먹자마자 따스함과 고기의 풍미가 혀에 퍼졌다. 안주 자체가 맛있으니 술이 훌훌 넘어갔다. 술 한 잔 기울 때마다 아쉬운 마음으로 입맛을 다셨다. 샘플러라 한 잔씩밖에 나오지 않는다. 가족들과 마시기 좋은 술로 추천한다.
니모메
#화이트와인
니모메는 귤로 만든 술이라고 해서 당연히 달겠거니 생각했다. '자몽에 이슬'마냥 과일 소주 같은 맛을 생각했는데, 마시자마자 내가 제주도 전통술에 엄청난 실례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전혀 달지 않고 담백한 맛인데도 귤맛의 그 상큼함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귤향은 나지 않았지만 마지막 맛에 단 향이 살짝 난다. 화이트와인이라는 태그가 있던데 회랑 마시면 잘 어울릴 듯하다. 입맛을 돋구면서 같이 나온 건빵을 열심히 먹었다.
맛은 깔끔한데 목 뒤로 넘길 때 묵직하게 걸리는 감이 있다. 부정적인 뜻은 아니다. 존재감이 확실한 맛이다. 메밀건빵이 샘플러 매칭 안주로 함께 나왔는데, 사실 이건 그냥 건빵맛이긴 했다. 차라리 더 단 안주랑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니모메가 미묘하게 가지고 있는 단맛을 그 안주로 돋보이게 해주어도 괜찮을 거 같다.
귤로만
#두 번의 반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색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귤로 만든 술이다. 귤 주스처럼 생겨가지고 아예 달달한 술이겠거니 하고 한 모금 넘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술이다. 첫입에 달달한 맛이 풍기다가, 갑자기 신맛으로 돌변한다. 마지막에 가서는 씁쓸한 맛이 자리잡았다. 어떻게 하나의 액체에 이렇게나 많은 맛이 들어있을 수가 있는 거지? 단순한 술이 아니었다. 반전 매력에 놀라서 가산점을 부여한다.
하지만 마시다보면 점점 반전매력에 익숙해진다. 단맛이 입에 감돌기도 하고, 같이 먹은 안주가 감귤칩이라 그런지 단 거 + 단 술 이라 특유의 신맛이 나중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맛이람?!"하고 놀랐다면, 이후에는 술 속에 숨겨져 있던 강렬한 단맛이 아예 혀를 지배했다. 술에 취하다보면 감귤 주스나 다름없게 느껴져서 단숨에 들이킬 거 같다. 사실 가장 조심해야 하는 술이다. 이런 거 맛있다고 막 먹다가 취하기 십상이다.
녹고의 눈물
#건강한 맛
내 취향은 너무 아니었다. 냄새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쌍화탕 냄새라고 해야할까. 한약방 앞에서 자주 맞던 냄새가 났다. 완전 건강한 맛이겠거니 싶긴 했다. 그런데 좋은 재료로 만든 술은 과연 건강에도 좋을까...? 의사 선생님은 이 술만은 허락해주시려나...? 한 입 마셨을 때 산 속에 있는 각종 뿌리의 건강이 내 몸안으로 확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맞춤 샘플링 안주는 초콜릿이었다. 녹고의 눈물이 쓰니까 초콜릿으로 달게 잡아주려는 건가보다. 달아도 너무 달아서 유일하게 거의 다 남긴 안주이다. 술은... 아까우니까 다 마셨다. 이하 생략.
메밀이슬
#최고급증류식소주
마지막 타자이자, 가장 강적인 존재. 40도라는 위엄에 덜덜 떨면서 직원분께 얼음을 달라고 요청했다. 얼음물이 녹기를 잠시 기다리다가 한 입 삼키자마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네 잔을 마시면서 취하진 않겠다고 자신했는데, 메밀이슬이 나의 다짐을 무너지게 만들어버렸다. 신기한 건 목넘김이 좋아서 술술 잘 넘어갔다는 거다. 목에 흐르는 거 같지도 않고 폭포수마냥 바로 위장으로 수직낙하한 거 같다. 알코올향에 메밀이 살짝 섞인 느낌이다. 도수 높은 술을 즐기는 어른분께 선물하기 괜찮은 주류이다.
같이 나온 샘플링 안주는 흑돼지 육포였는데 제일 맛있었다. 역시 육포가 최고다. 이 육포는 좀 사고 싶더라.
술을 다 마시고 난 뒤에 안 취한 척 정신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계산대 앞에 섰는데 내가 계산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나 사실 계산했는데 카드 내밀면 진짜 취한 사람처럼 보일텐데... 점원분이 "계산해드릴까요?"라고 말하길 기다렸는데 서로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산대에서 몇 초간 마주보았다. 그 정적. 내가 카드를 내밀자 자연스럽게 점원분이 받고 계산했다.
망했다. 내가 취한 걸 들킨 거 같다.
샘플러만 마신 게 아쉬울 정도다. 술도 한 병 사가고 싶었는데 일단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들러보기로 했다. 스마트스토어로 팔기도 한다. '제주 한 잔'을 검색하면 나온다더라.
나의 픽은 니모메! 너무 달지도 않고 담백한데 쓴맛도 거의 없었다. 니모메와 함께 회 한 점 딱 먹으면 너무 잘 어울릴 거 같았다. 잊지말고 기억해두자. 니모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