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러가 제주 방콕러가 되기까지
제주 한 달살이를 하면 인생이 달라질 거라는 환상을 품고 비행기에 올랐다. 문득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니, 침대에 잠옷을 입고 누워 벽에 반쯤 기댄 자세로 휴대폰을 하는 백수가 한 명 있었다. 집에 들어와서 장장 세 네 시간동안 휴대폰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 그게 바로... 여행의 묘미?
한 달 동안 사니까 적응이 되면서 그냥 삶이 되어버렸다. 집에서 하던 행동을 그대로 숙소에서 하고 있으니 그냥 집이나 다름 없었다. 장소가 제주일 뿐이다. 마음을 놓으니 꽤 그런대로 살만했다. 허물처럼 벗어둔 옷이 어지럽게 방바닥에 늘여져 있어서 감성 숙소는 어느새 자취방이 되어버렸다. 이대로 육지로 돌아가면 난 똑같이 살겠구나!
사실 오늘은 혼자 여행하는 마지막 날이다. 내일부터는 가족들이 와서 3박 4일을 지내다가 그대로 육지에 가는 비행기에 오른다. 이 숙소와도 마지막인데,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겨울철이라 추워서 창문을 꽉 닫아두고 사는 통에 귀를 열어두지 않으면 파도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바다를 즐기는 감성은 여행 초반에만 살짝 있던 거 같다. 그래서 갑자기 생각난 주제. 오늘은 여행 초반과 후반 비교다.
일주일 정도는 여행을 하면서 즐겨야 한다. 갈 곳이 너무도 많다. 이미 가고 싶은 장소를 카카오맵에 수십가지나 적어놓았다. 가는데 한 시간까지 걸리는 이동시간마저도 여행의 설렘 중 일부이다. 흑돼지 먹기, 고등어회 먹기, 고기국수 먹기! 소품샵을 가서 제주 여행에 도움도 안 되는 마그넷 같은 걸 사들인다. 특히 스스로 감성을 챙길 수 있을 거라는 헛된 생각을 하게 된다. 다이어리를 잔뜩 쓰고 스티커로 꾸며야지! 하면서 스티커를 여러 장 사기까지 한다. 독립서점에서 책도 잔뜩 산다. 이걸 다 읽을 거라고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여행 초보라서 여러모로 많이 데인다. 휴무 앞에서 좌절을 겪기도 한다. 대체 왜 이렇게 제주도 가게는 제멋대로 휴무를 하는 곳이 많은 걸까? 대체 왜?? 연속 세 번 휴무를 겪은 날에는 모든 의욕을 다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괜찮다... 나에게는 아직 21일이 남아있으니까! 여행을 갈 때 체험 위주로 가기도 한다. 바다낚시도 하고, 커피 만들기 체험도 하고... 제주의 체험이란 체험은 섭렵하고 싶었다. 오름도 가고 싶어서 이것저것 알아본다.
매일 아침 파도를 보면서 감격을 한다. 때론 일출을 보려고 일어나기까지 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아침 달리기도 한 적이 있다! 한 달 동안 두 번이지만. 아침 달리기를 하면서 동네 풍경을 바라본다. 집집마다 개를 키우고 있어서 한 번씩 인사를 한다. 그러다가 컹컹 짖는 애가 있으면 빠르게 도망친다. 달리기를 하다가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 풍경을 보며 눈을 반짝이기도 한다. 해안가를 달리다보면 중간마다 아래로 내려갈 수 있게 길을 뚫어둔 곳이 있다. 매끄럽게 길로 된 건 아니고, 커다란 까만 돌덩어리들을 균형을 밟고 잘 나아가야 한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
해가 진 이후 숙소에 있는 시간도 의미 있게 보내려고 노력한다. 한 달 살기라서 직접 밥을 해먹기 위해 장을 본다. 이때 장볼 때의 마음가짐만은 백종원이다. 백종원 유튜브를 토대로 전부 해먹겠다는 마음으로 이미 만들어진 반찬팩을 사는 건 거부한다. 밥을 많이 해 먹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며 쌀도 4kg을 샀다. 첫째주에는 오일파스텔로 그림도 그렸다. (그 이후로 그렸냐고요? 이하 생략) 다이어리도 썼다. (이하 생략)
일단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청소를 해야한다. 점점 집이 더러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주에는 그래도 당일에 설거지를 한 거 같은데, 벌써부터 설거지거리가 미뤄지고 있었다. 하루 날 잡아서 청소기 돌리고, 빨래 하고, 먼지 털고 하니 완전 프로 제주러가 된 거 같아서 뿌듯해진다. 아직 못 가본 여행지는 많이 있다. 더 좋은 여행지 셀렉을 위해서 제주 여행 유튜브를 주로 본다. 아직까지는 전날 밤에 다음날 어디 갈지를 계획해둔다.
변덕스러운 제주 여행에 좌절을 이미 몇 번 겪었다. 비가 온대서 아무런 계획도 안 하고 있었는데 다짜고짜 세상 제일 햇볕이 따스한 날이 되어버리면 당황스럽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비 오는 날은 안 나가도 된다는 생각이 박혀 있다. 왜냐하면 나한테는 아직 2주나 남아있거든! 시간은 많다고 자부하게 된다.
그래서 여행지도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동네랑 먼 곳으로 잡는다. 살고 있는 동네는 나중에 천천히 산책하면 된다면서 뒷순서로 미뤄두고 있다. (사실 내 동네가 놀 곳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도 그렇다. 어떻게 바로 앞에 카페도 하나 없냐고.) 그리고 버스를 탈 때는 아직 안절부절하다. 내가 내릴 정류장이 어디인지를 여러 번이나 다시 확인하고, 혹여나 버스 기사님이 안 세워주실까봐 빠르게 벨도 누른다. 제주도는 버스 한 정류장 잘못 더 가면 30분 이상은 걸어야 하는 곳 태반이다.
아직까지 이때는 혼밥하기 좋은 곳 위주로 알아본다. 유명한 곳에 가면 좀 쭈뼛쭈뼛하고,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감성 카페도 섣불리 가지 못한다. 혼밥족을 환영해주는 가게에만 슥 들어가게 된다. 네이버 검색에도 가게를 치면 뒤에 '혼밥' '혼자'와 같은 검색어를 붙인다. 그러면 바이럴마케팅 광고가 좀 적게 뜬다. 이건 꿀팁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이제 잊어버렸다. 첫째, 둘째주는 그래도 8시, 9시에 깨어나서 10시에 나갈 준비를 했는데. 이젠 눈만 떠도 10시다. 11시까지 아무런 준비도 안하다가 12시 맞춰서 나갈 때도 있다. 일단 계획은 당일날 날씨를 보고 아무렇게나 정한다. 충동적이게 되고 계획도 없다. 버스 타러 나가기가 엄청나게 귀찮아진다. 이래서 사람들이 숙소를 바꾸라고 하는 건가 보다. 똑같은 데에 있으면 생각보다 지루하다. 동쪽, 서쪽 한 번씩 나누면 리프레시도 되고 좋을 거 같다.
꾸미는 거에 관심이 없어졌다. 어차피 혼자 있는데 누가 사진 찍어줄 것도 아니고... 가끔 삘 받는 날에만 화장을 한다. 렌즈는 다행히 맨날 낀다. 왜냐하면 마스크 끼고서 안경을 착용하면 김이 서리는 게 매우 불편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라식, 라섹 수술을 하고 말 거라고 다짐하면서 렌즈를 눈에 넣는다. 이제 렌즈 눈에 넣고 빼기 고수이다. 8년차이다.
이제 넷플릭스 정주행을 시작했다. 저녁에 돌아와 넷플릭스를 하루 2화씩 보는 게 삶의 낙이다. 저녁? 밥값이 아까워지기 시작해 계속 해먹고는 있지만... 남은 재료들로 어떻게든 탕진 하는 게 목표이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가 너무 귀찮아서 최대한 싹싹 긁어먹으려고 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음식물 쓰레기 버리려면 티머니 카드가 필요하다는 사실! 삼성페이와 연동된 티머니도 되더라. 이것도 꿀팁!
집에 있는 날이 많아진다. 흐리거나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집에 있어야지, 하면서 느적느적 침대에 누워있는다. 죄책감이 좀 드는 날이면 한 번씩 바다 보러 산책 정도는 나가준다. 그러기만해도 만족스럽다. 바로 집앞에서 바다를 보는 삶이란.
웹툰,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모든 알고리즘은 섭렵한지 오래다. 계속 똑같은 알고리즘만 보여주고 있길래 새로고침을 무한정으로 한다. 이제 슬슬 외로움을 느낀다. 친구들도 보고 싶고, 집밥도 먹고 싶고, 새로운 걸 하고 싶다. 근데 어차피 집에서도 똑같이 침대에서 지내겠지, 싶다. 제주도에 있어서 좋은 점은 날이 좋을 때면 반강제로 일어나게 된다는 것. 날이 좋은데도 침대에 있다는 건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거 같아서 일어나게 된다. 강제로 날 일어나게 하는 제주 여행이다.
참고로 이제 아무데나 들어가서 혼밥 할 수 있다. 가족손님 틈에 와서도 와구와구 혼밥으로 먹을 수 있을 깡이 되었다. 감성 카페를 갈 수는 있겠지만 좋은 자리 차지하는 건 아직 눈치가 보일 거 같다. 대신 디저트 하나를 시키기로 했다. 이정도면 자릿세 될 거 같다. 버스를 탈 때도 혹시나 내가 내릴 정류장이 지나칠까 노심초사하지 않는다. 잠깐 눈 감았다가 뜨면 내가 내릴 정류장 바로 전즈음이다.
혼자 있으니까 집이 너무 그리워진다. 윌슨을 하나 만들어야 하나 싶다. 오래동안 제주도에 머물 생각이라면 차라리 게스트하우스 스텝을 하는 걸 추천한다. 파티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파티 없는 소수 게하 스텝도 있으니까 찾아보면 좋다. 적당한 노동과 적당한 인간관계가 삶을 더 쾌적하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좀 외향적인 사람이라면 여행 중에서도 얼마든지 관계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절대 말 안 거는 성향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너무 평온한 삶이다.
이젠 제주 여행이 아니라 집에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을 계획한다. 너무 많다. 미뤄둔 자격증 공부도 해야하고, 개강할 준비도 해야한다. 제주 한달살기 여행을 막 왔을 때처럼, 집에 돌아가면 새로운 삶을 살 거라는 기대를 한다. 일단 한 달 살기를 하느라 막 써버린 돈을 어떻게 수습할지를 고민한다. 돈 버는 것만 고민한다. 참고로 제주도에 있는 동안 주식 시장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주식판이 망했다는 소문을 들어서이다.
이렇게 넷째날까지의 제주 여행이 마무리가 되었다. 지금 브런치에 글을 쓰는 시점은 이미 몇 개월이 지난 후이다. 제주 한 잔 매거진 글을 쓰다보면 그때의 바다가 떠오른다. 갈수록 나태해졌지만, 오히려 그 나태함을 즐길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나는 나태하려고 제주도에 간 거였는데 마지막에는 스스로의 나태함에 질려서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원. 아직도 숙소에서의 아침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포근한 이불에서 일어나서 창문을 열면 펼쳐지는 바다의 풍경. 집 앞으로 신발 질질 끌고 나가서 파도가 휘몰아치는 소리를 듣던 날들. 이제는 슬슬 그때의 제주가 그립다. 참, 좋았다. 나중에 다시 한 달 살기를 할 기회가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