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상이 24시간 생중계 된다면? 영화 "트루먼 쇼"
나는 요즘, 어렸을 때는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꼭 봐야지 하고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옛날 영화들을 한 편씩 찾아보는 게 취미가 되었다.
마치 서랍 속에 숨겨둔 초콜릿 상자에서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을 하나씩 꺼내 먹는 듯한 기분이 든다.
요 몇달 사이에 본 영화만 해도 지옥의 묵시록, 어퓨 굿맨, 티파니에서 아침을, 탑건, 아비정전, 현기증, 시민 케인, 태양은 가득히 등이 있다.
얼마 전에는 1998년에 개봉한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 쇼'를 봤다. 짐 캐리의 대표작 중에 하나로 뽑히기도 하고 이 영화를 인생작으로 뽑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은 유명한 작품이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트루먼 쇼'라는 단어 자체가 촬영 대상은 자신이 찍히고 있다는 걸 모르는 리얼리티 쇼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쓰인다.
1998년 개봉 당시에 나는 고등학생이라 나중에 봐야지 나중에 봐야지 하고 미루다 보니 어느새 25년이 훌쩍 지나서 보게 되었다.
그럼 먼저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짐 캐리가 맡은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 바로 트루먼이다. 이름부터가 진실을 뜻하는 TRUE에서 E를 뺀 'T R U M A N'. 진실한 남자. 이 남자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게 다 만들어진 거짓이었다.
거대한 돔 안에 구축된 세트장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고 취직해서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한 남자의 모든 일상이, 이 사람은 알지 못한 채 수천 대 카메라를 통해 세계 각국에 24시간 라이브쇼로 방송되고 있었다.
가족과 친구, 이웃과 직장 동료, 심지어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행인들마저도 총괄 PD인 크리스토프가 연출한 대본과 동선대로 움직이는 연기자였던 거다.
게다가 트루먼이 이 세트장에서 벗어나 진짜 현실로 나가는 걸 막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는 교육을 통해 지금 사는 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주입시키고, 미디어에서는 끊임없이 여행의 위험성에 대한 뉴스나 TV쇼가 흘러나오고, 심지어 트루먼이 아빠와 바다낚시를 하던 중에 폭풍우에 휘말렸는데 아빠 역할의 출연자가 목숨을 잃게 된다는 극단적인 연출까지 동원해 트루먼에게 물공포증이라는 트라우마를 심어주기까지 한다. 물론 그 아버지는 죽은 척 연기를 했던 거고 사실은 살아있었지만.
그러던 어느 날, 트루먼은 길에서 우연히 노숙자로 변신한 아버지를 마주치는데, 그 일을 계기로 점점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미묘하게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눈치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의문을 갖기 시작한 트루먼은 고향을 떠나려고 몇 번이고 시도하지만, 갑작스러운 교통 정체가 발생한다던지, 비행기 티켓이 전부 매진된다던지, 고속버스를 타고 도망가려고 하니, 갑자기 버스의 엔진이 고장 난다던지, 심지어 여차저차해서 겨우 마을을 벗어났더니 원자력 발전소에 핵폐기물이 누출되었다는 급조된 긴급 상황에 휘말리면서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결국 트루먼은 방송 스탭들과 카메라를 속이고 지하실을 통해 겨우 탈출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황에서 쇼의 시청률은 급등한다.
그리고 많은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트루먼이 작은 보트를 타고 호수를 건너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
총괄 PD는 트루먼의 탈출을 막기 위해 호수에 거대한 폭풍우를 만들기까지 하는데, 마치 트루먼 쇼라는 거대한 세계를 창조해낸 절대자, 신과 같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트루먼은 자유를 향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그의 보트가 세트장 벽의 가장자리에 도달한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거짓이라는 걸 자각하고 진짜 세상으로 떠나려는 트루먼을 향해 총괄 PD인 크리스토프는 마이크를 연결해 바깥 세상은 안전하지 않으니 지금까지처럼 세트장 안에서 안정된 삶을 살라고 그를 설득한다.
하지만 결국 트루먼은 시청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세상의 전부인 줄로만 알았던 세트장을 떠나 현실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
이 영화에서 흥미롭게 그려지는 장면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트루먼쇼가 TV쇼이다 보니 간접광고라고 할까? 각종 PPL이 등장한다.
트루먼의 아내는 심각한 부부싸움 중에 난데없이 식탁에 있던 코코아를 집어들고는 "새로운 맛을 느껴보세요!"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말하고,
트루먼이 유일하게 마음을 나누던 친구는 늘 같은 맥주를 마시는데 언제나 카메라에 상표가 잘 비치는 앵글에 맞춰 "역시 이게 진짜 맥주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그러고 보면 지금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간접광고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땐, 스스로를 홍보한다는 뜻의 '자기 PR의 시대'라는 말이 유행이었는데 지금은 '자발적 PPL의 시대'라고 해야 할까? SNS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상품들을 확산시키면서 무료로 광고해 주는 시대가 되었다.
돌이켜 보면, 나 또한 간접광고는 물론이고 자발적으로 트루먼 쇼를 찍던 시절이 있었다.
한때는 SNS 중독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인스타그램 스토리가 너무 재밌어서 매일 같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서 스토리에 올리곤 했다.
어딜 갈 때마다, 그 장소와 지금 먹고 있는 것과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하루에도 몇 개씩 이런 것들을 올리면서 그 당시에는 내 삶을 기록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내 스토리를 누가 보는지 너무 궁금했고 그 관심을 즐겼던 거다.
특히나 헤어진 남자친구가 여전히 내 인스타 스토리를 보고 있으면 왠지 더 우쭐해졌다.
"이 사람이 아직도 보고 있네?" 하는 마음에
"그래, 나 이렇게 즐겁게 잘 살고 있다!"라고 보란 듯이 스토리를 올렸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점점 주객이 전도되어서 내 삶을 기록한다고 생각했던 행위가 어느새 그저 인스타그램을 꾸미기 위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하면서 허무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자연스럽게 SNS를 디톡스 하게 되었다.
또한 스마트폰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과 경험을 함께하고 있는 내 눈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롯이 집중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 영화에서는 트루먼이 알지 못한 채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24시간 방송되고 있었는데, 이게 만약 실제 상황이라면 굉장히 섬뜩한 이야기다.
또한 총괄 디렉터는 모든 변수를 통제하고 모든 것을 컨트롤하는 사람으로 그려지는데, 트루먼의 인생을 조종해서 얻은 성공이 자신의 커리어와 자랑인 셈이다.
심지어 트루먼이 보트를 타고 세트장을 탈출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호수에 폭풍우 장치를 동원하기까지 하는데, 주변 스탭들은 이러다 트루먼이 죽을지도 모른다면서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가장 강도가 센 폭풍우를 가동시킨다.
그 장면을 보면서 트루먼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려는 그의 집착이 정말 끔찍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총괄 PD는 마치 트루먼 쇼의 세트장처럼 자기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마련해 놓고 자기가 구축한 인생플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자녀를 통제하는 유형의 부모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 아이에게는 실패나 좌절과 같은 힘든 경험을 맛보지 않도록 만들면서, 아이의 인생이 곧 나를 증명하는 커리어와 자랑인 셈이다.
하지만 약간의 소금이 들어가야 달콤한 맛이 더 진해지고, 발바닥에 굳은살이 배겨야 자갈밭도 걸어갈 수 있듯이 아이가 성장 과정에서 결핍과 좌절을 맛보지 않으면 나중에 성인이 되어 실패에 부딪혔을 때 그 상실감과 좌절감을 스스로 극복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영화에서 가장 아이러니했던 건, 그 모든 대소동이 막을 내리고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가 있던 프로그램인 트루먼 쇼가 끝이 났는데 실제 세상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거다.
트루먼 쇼를 보며 열광하던 시청자들은 "다음엔 뭐 볼까?" 하면서 금세 관심이 식었다.
이런 걸 보면, 역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는 다 한 때뿐인 거 같다.
나조차도 작년, 재작년 이맘때쯤 "내가 무슨 일에 열광했었지?"하고 돌아보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굳이 찾아보더라도, 이제 와서 생각하면 별일이 아니었던 경우도 많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기보다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충실히 묵묵하게 살아가고 싶다.
고전 소설 '데미안'의 가장 유명한 문장.
"새가 알을 깨뜨리고 나오듯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물론 바깥세상은 춥고 배고프고 때로는 상처받는 일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안정적인 세계를 벗어나 기꺼이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갈 것을 선택한
트루먼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오늘도 알을 깨고 나와 각자 자기 자리에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모두를 응원하고 싶다.
제 목소리를 통해 이 에피소드를 듣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https://youtu.be/agWtvTgbwZQ?si=Gw6X5bUUCAqqIpv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