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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호 Mar 17. 2024

사랑하기 위해서

아기를 낳고 기르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로 82일 차 하루를 시작한 애월이는 아침에 일어나 배가 고플 법도 한데 누워서 낑낑거리며 혼자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팔다리를 버둥거리기도 하고 몸통을 한쪽으로 기울이기도 하고, 아마도 뒤집기를 연습하는 건가 싶어 한참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아직은 힘들지. 결국 울음을 터뜨리려고 한다. 잽싸게 거실로 나와 분유를 타 맘마를 먹이고 트림을 시켰다. 냉장고 옆면에 붙은 차량용 햇빛 가리개의 알록달록 과일 그림을 보면서 방긋방긋 웃는다. 나를 보면서는 간밤에 할 말이 많았는지 옹알이를 그치지 않고 계속한다. 기저귀를 갈아 주고 마사지를 해주고 동요를 불러주면서 놀다 보니 이제는 잠이 왔는지 보채려 했다.



  육아에 대해서 사람들은 양육자의 삶을 포기하고 아기에게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한다고 말들 한다. 그 말은 맞는 말이다. 이 친구들은, 특히 갓난아기 시절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돌봐주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양육자의 시간적, 육체적, 정신적인 희생을 통해 자라난다. 아마 「나의 삶」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즘 절대 선택하지 말아야 할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최소 50일까지는 집 안에서 아기를 보느라 꼼짝도 못 해, 어디 한번 나가려면 보통 일도 아니거니와, 아기가 한 사람 몫을 어느 정도 하기 전까지는 양육자에게 신체적 자유는 없다. 그러면 아기를 왜 낳아 기를까, 라는 질문을 자연스레 품게 되지만 오늘은




나는 왜 육아를 시작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어떤 요인이 나로 하여금 스트레스를 받게 만들었을까?



  에 대해서 적어보고자 한다.








  애월이는 스트레스 요인이 아니었다. 만약 이 친구가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면 나는 이 원인을 제거하거나 없는 척 무시했을 텐데 내게 가장 소중한 내 자식을 그렇게 대할 리 만무하다. 만약 스트레스의 원인이라며 내 생에서 이 친구를 없애버리기라도 한다면 나는 「스트레스」라는 단어로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곰곰 생각해 보면 출산 후 육아를 하면서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은 세 가지였다. 요즘은 이 세 가지가 없어져서 정신적으로 쾌적한 삶을 누리고 있다.



밤 수면 불가



  나는 빛에 예민하고 귀가 밝은 편이다. 그래서 낮에는 아예 자지 못한다. 그래서 밤에 잘 자야 하는데 아기를 키우면, 그것도 신생아를 키우면 밤에 감히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리고 출산 후에는 왜 그랬는지 밤에 잠을 깨면 다시 잠들기가 어려웠다. 그런 까닭에 3일 동안 여섯 시간 자고 육아를 한 적도 있었는데 그땐 정말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대부분 육아 초반의 제일 큰 곤욕은 잠을 못 자는 것 아닐까 한다. 나의 경우는 잠을 충분히 못 자니 몸의 회복이 더뎠고(입술 포진도 안 낫고, 기침도 안 낫고) 마음에도 감기가 쉽게 들락 말락 해서 많이 힘들었다.



개인 시간 없음



  아기가 깨어 있는 시간에는 온통 아기에게 집중해 있을 수밖에 없다. 요즘은 애월이가 먹놀잠 사이클을 두 번 거치면 하루가 거의 끝나간다. 초저녁이 되고, 목욕을 시키고 그대로 자주면 땡큐지만 아니면…. 애월이가 낮잠을 길게 자기 시작한 요즘에는 이렇게 짬짬이 글도 쓰고 일기도 쓰고 브런치도 보고 책도 읽고, 웬만한 할 일은 다 할 수 있지만, 먹잠먹잠의 시절에는 이게 불가능했다. 아기를 케어하는 일 자체는 몇 번 해보면 능숙해지기 때문에 그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먹잠의 텀이 짧기 때문에 신생아 시절에는 개인 시간이 아예 없다.



  나는 원체 집순이어서 밖을 못 나가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 만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사람을 덜 만나게 된 상황은 오히려 좋았다. 하지만 개인 시간 없이 계속해서 지내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터널 비전에 암울하기만 했다. 산후도우미 선생님, 남편과 친정 엄마가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나의 마음가짐을 빠르게 변경하는 일도 필요했지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터널을 빠져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더 걸렸을 것이다.



육아관 충돌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면 장점도 많지만 최대 단점은 이거였다. 나는 아기를 키워 보지는 않았지만 유튜브 소아과 선생님들의 이론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친정 엄마는 14년 차 현직 베테랑 아이돌보미 선생님이었다.. 「제발 이 선생님으로 연계해 주세요」라고 요청을 받을 만큼 어린 아기들을 잘 키우셨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매번 소아과 선생님들이 이러더라며 들먹거렸다. 엄마의 분노 지수를 한껏 상승시키며…. 원래 적당히 아는 사람이 위험하다고 하는데 그때의 나는 물러섬을 몰랐다.



   세상에 있는 많은 육아법은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와 같다. 모든 아기에게 절대적으로 들어맞는 육아법 같은 건 없었다. 하늘 아래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듯이 아기도 마찬가지다. 양육자가 느끼기에 바람직한 육아 방식인 것 같아 적용하려고 해도 내 아기에게 안 맞으면 아니다. 이걸 깨닫기까지 한 달 반 걸렸다. 엄마 미안. 결국 육아관 충돌로 인한 스트레스는 애바애라는 진리를 깨닫고 엄마 말을 듣게 되면서 해소되었다. 요즘은 엄마에게서 육아 꿀팁을 많이 전수받아 쉽게 쉽게 육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진작에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아무튼 지금이야 괜찮지만 어른과 육아로 충돌하는 일은, 스트레스라는 가연성 소재를 마음속에 가득가득 쌓아 넣고 있었는데 거기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다.  폭발과 굉음(?), 그리고 어마어마한 파괴적 에너지로(?) 이미 황폐해진 정신이 더욱 피폐해진다. 현명하게 대처해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 아빠와도 육아로 충돌한 적이 있었는데 아빠의 말을 하나도 듣지 않음으로써(아빠는 우리 남매도 키워본 적이 없다. 그 시절 아버지들이 거의 다 그랬듯이) 승리를 이끌어냈다(?).






  밤에 자지 못하는 건 굉장히 괴로웠지만, 사실 개인 시간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포기를 했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외부의 도움을 받는 일, 그리고 내면을 변화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기를 낳은 이상 내 시간은 (한동안)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그와 관련된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그러고 나니 행복하고 마음 편안해지는 사람은 나였다. 이런 마음가짐은 내가 둘째, 셋째를 키우게 되어 혼란스러움이 두 배, 세 배가 되더라도 흔들리지 않게 해 줄 것 같다. 너무 성급한 표현일까? 낳아 보면 알겠지.



  그런데 그렇게 힘들고 괴로운데도 아기를 낳아 기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기가 무조건 잘 자랄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아기라는 존재는 미래를 담보로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지금 바로 조건 없이 사랑하게 되는 존재.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넘치다 못해 나 자신에게 다시 흘러온다. 왜 아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일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는 결과로 귀속되는 걸까.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기를 낳았다는 효능감? 그렇다면 아기를 낳고 기르는 일은 결국 나를 사랑하기 위함이라는 말일까? 아니다.



  아기를 낳고 기르는 일은 누군가를 지극히 사랑하는 기쁨을 알기 위해서,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본 사랑으로 타인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 라고.



24. 0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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