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함은 축복이다

나는 '정상인'이 아닌 걸까?

by 제나로
“Timeless Words” – 23 famous quotes unveiling the secret of time.jpeg 매 시간 긴장을 놓칠 수 없다. (사진출처: loopholesonlife)

민감해서 힘든 점은 손에 다 꼽을 수 없다.

다음은 사무직이었던 나의 하루 일과를 각색한 것이다.

오전 6시

: 알람에 눈을 뜬다. 옆 침대의 동거인이 잘 잤냐고 물어본다. 입냄새가 날까 봐 이불로 입을 가리고 대답한다.

오전 7시
: 새로 산 셔츠를 입고 나왔다. 목덜미에 붙은 상표가 너무 간지러워 수시로 뒷목을 벅벅 긁는다.

오전 8시

: 사람들 틈에 떠밀려 지하철에 탔다. 향수로 샤워라도 한 듯한 옆 사람의 지독한 냄새를 참기 어렵다.

오전 9시

: 사무실에 출근했다. 물티슈로 책상 주변을 닦는다. 전날 닦아둔 텀블러는 뜨거운 물로 소독하고 사용한다.

오전 10시

: 동료들이 출근하기 전에 속도를 내서 일한다. 옆에 아무도 없어야 일이 잘 된다.

오후 11시

: 뭐 먹을까요? 팀장님의 질문에 절대 답하지 않는 식당은 입구부터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 놓는 곳이다.

오후 12시

: 식당에서 주문을 하고 기다린다. 식기 부딪히는 소리, 들락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대화에 집중하기 어렵다.

오후 1시

: 카페에 왔다. 바쁘지도 않은데 투 샷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열심히 일할 수는 없다.

오후 2시

: 온통 통창이라 환기할 수도 없는 사무실에 들어서면 숨이 턱 막힌다.

오후 3시

: 미팅을 위한 회의실 자리에는 커피가 있지만 마실 수 없다. 열두 시간 뒤에나 잠에 들 수 있을 테니까.

오후 4시

: 등 뒤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내 모니터를 보고 가는 것 같아서 집중할 수가 없다.

오후 5시

: 해가 길어지면서 자리 건너편 창고 벽면에 반사되는 햇빛 때문에 눈이 벌써 충혈돼 있다.

오후 6시

: 책상 위의 몇 안 되는 물건들을 모두 정리했다. 겨우 들릴 만큼 인사하고 조용히 자리를 떠난다.

오후 7시
: 친구와 ‘핫플’에서 대기를 한다. 너무 더워서 속옷이 다 젖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리 더워 보이지 않는다.

오후 8시

: 소주 반 병을 마셨더니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불까지 타고 올라온다. 옆 테이블의 대화가 신경 쓰인다.

오후 9시

: 술을 잘 마시는 친구에게 맞춰 주느라 주량보다 더 많이 마셨다. 어금니를 깨물며 집에 가는 길을 찾는다.

오후 10시

: 입었던 셔츠는 단추를 다 잠가서 빨래통에 넣어 둔다. 토할 것 같지만 양치를 마치고 샤워까지 한다.

오후 11시

: 보송한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운다. 내쉰 숨이 이불에 부딪혀 돌아올 때마다 알코올 냄새가 나지만 이불은 꼭 덮어야 한다.


나는 내가 저주받았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에 크게 자극받는다. 사무실 옆 자리 직장 동료에게 노을이 예쁘다고 말하면 회사라서 그래 보이는 거라는 대답을 듣는다.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물으면 환청을 듣는 거라는 대답을 듣는다. 지나가는 말로 하는 건데 뭐 그리 신경 쓰냐는 대답을 듣는다. 이것도 다 사회생활이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대답을 듣는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차단할 수도 없다. 때때로 너무 덥거나 춥다. 너무 건조하거나 습하다. 남들은 괜찮아 보이는데 나만 신경 쓰이는 것 같다. 나는 ‘정상인’이 아닌 건가?



민감함은 축복이다

만약 내가 히어로라면

내 주변에서 나처럼 저주받은 사람을 찾기는 어려웠다. 가끔 외로운 기분이 들 때면 아무도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세상에 성격이 똑같은 사람은 없다지만 나는 왜 이렇게 다를까. 어느 날, 히어로 영화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저주가 내게만 있는 능력이라면? 이 능력을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느꼈던 저주는 사실 내 능력의 페널티(Penalty)가 아닐까? 신께서는 내 능력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사실 나는 신께 축복받은 히어로일지도 몰라.


채팅 AI에게 물어보았다. 저주와 축복의 공통점은 뭘까?

스크린샷 2023-05-02 오후 7.21.19.png Chat GPT가 설명하는 저주와 축복의 차이

그에 의하면 저주와 축복은 모두 상황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확실히 내 능력은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다. 아무 음식점에나 들어가서 매번 만족할 수는 없다. 번화가의 카페에서 업무에 집중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신경 쓰이는 건 안 보면 그만이라는 말에는 평생 공감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르게 표현해 보자면 이렇다. 사전 정보 없이 아무 음식점에나 들어가서 맛본 음식에서는 그 식당에서 많이 쓰는 재료를 머릿속으로 맞추며 풍미를 느낄 수 있다. 번화가의 카페에서는 친구와 실컷 수다를 떨거나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신경 쓰이는 건 제대로 쳐다보고 혹시나 잘못됐다면 내가 나서서 고친다.


저주와 축복은 같은 능력일 수 있다.

긍정적인 쪽을 선택한다면 더욱 행복한 에너지로 살아갈 수 있다. 나는 남들과 같은 풍경을 보고도 더 아름답다고 느낀다. 나는 남들과 같은 음악을 듣고도 더 감동받는다. 나는 남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도 더 풍부함을 느낀다. 내가 가는 곳마다 즐길 거리들이 가득하다. 내 예민함으로 나의 인생을 더욱 다채롭게 채워나갈 수 있다. 이제 나는 나의 예민함을 축복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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