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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나로 Apr 02. 2024

그냥 쉬고 있다고 말하기

직장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

이미지 출처: brooke

직장 밖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은 이후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멘탈관리였다.


나는 서비스 기획이라는 나의 일에 비수기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언제든지 일감이 있는 금융 프로젝트는 시작하겠다고 말만 하면

직장 다닐 때보다 네 배의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외주 기획자가 투입되는 금융 프로젝트는 근무환경이 좋지 않으리라는 것이 빤했다.

그런 류의 프로젝트는 애초에 선택 제외 대상이었다.

비슷한 느낌의 프로젝트들을 피하고 피하다 보니, 내가 흘러들어온 곳은 스타트업 씬이었다.


한국 스타트업은 민간과 정부 투자로 사업이 운영되는 곳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래서 투자가 활발할 때 내가 일할 거리도 많다.

투자 시장은 대부분 연초에 활발하고,

기획이라는 일은 프로젝트의 전체 생애주기에서 초반부에 많은 공수가 들어가기 때문에

스타트업 기획자로 포지셔닝한 나는 연초에 일감이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거다.


나는 그런 구조에 대해 잘 몰랐다.

나는 직장 밖에서 먹고사는 형태의 일을 연중 연말에 시작했다.

인력시장에 홀로 나서서 처음으로 일감을 따온 곳은,

투자를 받지 않고 스스로 내는 매출로 먹고사는 스타트업이었다.

나는 더 다양하고 많은 일감과 더 많은 수입을 원해서 인력 시장을 헤맸다.

마음에 들지 않는 프로젝트 공고만 가끔씩 보일 뿐이었다.


원하는 일이 없어서 미쳐버리는 것 같았다.

내가 남들처럼 무던하게, 한 직장에 오래오래 다닐 수 있었더라면-

아무 데나 돈 많이 주는 곳으로 가서 일한다면-

차라리 아주 태평한 사람이었어서 일하지 않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더라면

이렇게 매일 불안에 떨며 새벽같이 일어나서 과하게 생산적인 하루를 보내지 않았을 텐데.

나는 이런 삶의 형태에 맞지 않는 사람인 건가?

매일 몇 번씩이나 스스로에게서 답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사람이라도 만나러 갈 일이 생기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요즘 뭐 하고 있냐는 질문에 ‘그냥 쉬고 있어요’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취업 준비생도 아니고, 이직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내 사업을 오토로 돌리는 사장님도 아니니까.

나는 다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겨울의 막바지까지 시간이 흐르고 여기저기서 사업공고가 터져 나왔다.

나도 내 아이템을 기획해, 사업계획서를 써서 초창패 모집공고에 응모했다.

내 아이템을 얼른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지속가능한 사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초창패를 준비하는 다른 대표님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스타트업 대표 모임에 들어갔다.

투자는 연초에 활발하다는 것을 그 모임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들로 실감했다.

아, 그동안 나는 얼어붙은 강에서 고래를 찾아다녔구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동굴에 있다가, 별안간 해가 쨍한 초원으로 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정신병을 조금 더 앓다 보니 봄이 됐고, 일감이 쏟아졌다.

하루종일 문의에 답장만 하기도 벅찼다.

당장 돈을 줄 테니 내일부터 일을 해달라고 하는 문의가 여기저기서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 성수기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일은 없었을 텐데.


비수기와 성수기가 교차하는 한 사이클을 돌려 보니 느끼는 것들이 있다.

내가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시기가 있다는 것,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복이 굴러들어 오는 시기가 있다는 것,

겨울을 잘 버티면 봄이 온다는 것,

겨울을 잘 버텨내려면 저축도 잘해놓고, 잘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휴경이라는 말이 있다.

농사를 지을 때 지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 해 농사를 쉬는 일이다.

휴경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토양 독성이 빠지고 비옥도가 회복되는 동안 지력 소모가 덜한 콩류의 작물을 소량 재배하며 소소한 농사를 지으며 버티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재배하지 않고 방치해 놓는 것인데, 병충해 감소의 효과도 있다.


내 일의 생애주기에 휴경을 지낼 수 있도록 해준 이 산업에 감사하다.

이제 나는 비수기와 성수기를 구분할 수 있다.

성수기에 열심히 일해서 비수기를 대비하고,

비수기에는 푹 쉬면서 성수기를 대비하려고 한다.


직장 밖에서 먹고사는 이들, 프리랜서들, 1인 사업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런 불안정한 시장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계속 걸어 나갈 수 있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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