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새벽을 알리고 있다. 농부들은 저 소리에 눈을 뜨고 일과를 준비할 텐데, 나는 아직 잠자리에 들지도 않고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일 년 넘게 내팽개쳤던 소설 초고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시 매만지면서도 대차게 덤비기는커녕 코뚜레에 끌려가는 꼴로 600매 언덕을 넘기니 가슴이 뻑뻑하다. 그래 잠시 머리를 식힐 겸 한눈팔기로 잡문이나 하나 쓰면서 숨통을 틔우려 한다.
내가 제천의 천둥산 박달재 근처의 시랑산방에 도착한 날은 5월 6일이다. 와보니 앞뜰의 작은 개가 새끼를 낳아 아직 눈도 뜨지 않은 3마리가 있다. 닭장에는 암탉이 둥지에서 알을 품고 있다. 주인장 말로는 시랑산방 생활 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매일 유정란을 쏠쏠히 빼먹다 보니 닭이 알을 품을 기회마저 뺏은 셈인데, 주인이 며칠 집을 비운 새 몇 개 모인 것을 기회 포착하여 알을 품은 것이란다.
주인 부부는 내게 집을 맡기고 꼭 탈고하라며 신신당부하고 여행을 떠났다. 이제 앞뜰의 어미 개와 뒤뜰의 수캐에게 끼니를 주고 닭장에 모이 주기가 중대한 내 일이 되었다. 개구리 울음소리와 이름 모를 새소리, 바람 소리로 나는 혼자이지 않다. 적막이 고즈넉이 찾아오는 밤이면 나의 깊이에 조금 더 다가서고 싶어 말갛게 밤을 새운다. 여러 사람의 염려 속에서 일상을 멈추고, 입원 권유를 뿌리치고 온 여기서 얼마나 심신을 회복하고 나를 찾을지 알 수 없다. 글쓰기가 버렸던 나를 되찾는 일인 양 매달리면서 지금은 그저 무엇인가를 풀어내는데 정신과 육신을 몰입하고 싶다. 그리고 또 시간이 얼마큼 지나면 지금의 결과야 어떠하든 다시 주어지는 내 길을 갈 것이다. 하던 일로 돌아갈 것인지, 글쓰기로 완전히 돌아서고 싶을지 지금은 모르겠다.
매일 닭장에 다가가서 알을 품고 있는 암탉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눈만 깜빡거리며 꼼짝도 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서 자세만 약간씩 바뀌어 있을 뿐이다. 모이를 먹는지 물을 먹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수탉은 근처를 배회하거나 횃대에 올라앉아 가끔 목청을 울리며 사뭇 경계병 같기도 하다. 개와 닭에게 물을 주면서 초보 농부가 심어놓은 고추와 상추 파 등에도 물을 뿌린다. 오늘은 오후에 산 중턱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에 닭장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끈기와 의무감에서 나는 저 암탉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한 20일 지나면 나 혼자 신생한 병아리들을 볼 것이다.
불교 선(禪) 수행의 지침서인 벽암록 16칙에 나오는 줄탁(啐啄; 줄탁으로 잘못 읽어서 굳어졌지만, ‘啐’는 맛볼 ‘쵀’이니 ‘쵀탁’도 맞다)이란 말을 새겨 본다. 어미 닭이 일정 기간 알을 품고 있으면 알 속에서 다 자란 병아리가 여린 부리로 밖으로 나가겠다는 신호로 껍질을 콕콕 친다. 이것이 줄(啐)이다. 아주 미세한 그 소리와 움직임을 알아채고 어미 닭이 강한 부리로 밖에서 그곳을 쪼아준다. 이것이 탁(啄)이다. 이 두 가지 움직임이 동시에 맞아떨어져야 생명이 알에서 나온다. 벽암록에는 이것을 줄탁동시(同時) 또는 줄탁동기(同機)라 하며, 수행하여 깨침의 순간에 스승과 제자가 가지는 역할의 중요성을 이 말로 비유하기도 한다. 부모와 자식 간이나, 스승과 제자 간이나, 사랑하는 사람 간이나, 일과 자신 간이나, 무릇 많은 현상에서 우리는 줄탁을 생각할 수 있다. 줄탁동시가 이뤄지면 일이 성사되고, 사랑이 이뤄지고, 작품이 탄생한다. 하지만 사람끼리는 병아리와 어미 닭의 교감만큼 동시에 딱 맞아떨어지기는 쉽지 않다.
여기 내려오기 전 나는 심각해진 건강 문제에 겹쳐 사업도 난항을 겪게 되었다. 합병증에 치매까지 온 어머니 때문에도 속상했고, 아내가 사기를 당해 잠을 못 잘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내가 이룬 것과 하고픈 것을 포기하기가 힘들었다. 결단하고 다시 태어나려면 무엇과 무엇이 만나야 하는데, 그것은 공간과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알게 모르게 '줄'을 표현하여 누군가의 '탁'을 받아왔기에 나의 삶이 영위되어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나는 과연 누군가를 위해서 얼마나 '탁'을 해 주고 있는가? 그것도 꼭 필요한 순간에, 그에게 가장 필요한 무엇을 해 주려 긴장하고 기다린 적이 있는가? '줄탁'은 생명이 탄생하는 고도의 신비에 필요한 감각적 Communication이다. 나는 어떤 생명을 위해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대화할 준비를 하고 있나? ‘줄’의 신호를 받고도 ‘탁’의 때를 놓쳐 얼마나 많은 것들을 흘려보냈거나 잃어버렸을까?
여기서 내가 혼자인 듯하여도 산이 있고 들이 있고 나무가 있고 풀이 있고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새소리가 들린다. 나는 무엇과도 교감할 수 있는 존재이다. 내가 몸과 마음의 모든 감각을 열고 교감하며 살아야 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생명을 위해서이다. 내가 받은 고마움을 알면 타인에 대한 용서와 배려가 쉬워지고 나 또한 편안해진다. 나의 삶이 다소 가벼워지거나 무거워지거나 그것은 지금의 인식일 뿐, 언제 어디서 어떤 교감으로 새로운 생명력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지금 알의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