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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양섭 Nov 19. 2022

기억 나무

  아기 같기만 한 손자가 입학한다니 슬며시 웃다가 엉뚱한 상념에 젖어든다. 사람은 누구나 기억 나무 한 그루 키우고 있지 싶다. 나이가 들수록 가지가 무성해지고 열매를 맺고 떨어뜨리고 하겠지만, 기억 나무는 시간으로 자라지 않는다. 열매도 순서가 없다. 지나간 날의 숱한 사연들을 다 매달고 있지도 않다. 기억 나무의 뿌리가 닿아 있는 기억의 샘은 새 물이 더해져도 오래된 물이 넘치지 않는다. 그 물을 먹고 늘 영롱하게 빛나는 기억의 열매는 다시 꿈을 꾸게도 한다. 내 기억 나무의 씨앗이 되고 뿌리가 된 장면들은 지금도 눈앞에 상영되는 영화처럼 생생하다.     

  내가 처음 외운 우리 집 주소는 부산시 동구 초량동 산의 865번지였다. 1965년, 가슴팍에 콧수건을 달고, 4학년이 된 누나의 꽁무니를 쫄래쫄래 쫓아가 초량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반은 78명이었고 그런 반이 14반까지 있었다. 오전반이거나 오후반이거나 수업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면 길가에 늘어선 가게에는 갖고 싶은 것들이 엄청 많았다. 공책, 색종이, 크레용이 펼쳐져 있고 껌, 쫀드기, 알사탕과 과자들이 항상 눈길을 끌었는데, 무엇보다 태엽을 감아주면 움직이는 장난감은 정말 유혹적이었다. 그것은 덕지덕지 기운 옷을 입고, 밑창을 때운 검정고무신을 신은 내가 꿈도 꿀 수 없는 큰돈 10원이나 했다. 그럴 때만 잠깐 아버지 생각이 났다.

  교문 밖 오른쪽에 디딤 못이 양쪽으로 박힌 나무 전봇대가 높다랗게 서 있었다. 그 곁 학교 담벼락에 붙어 엄마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앞에는 타원형으로 썰어 몇 개씩 포개 놓은 칡이 도마 위에 있었고, 도마 아래에는 한 쪽 올이 풀려 터진 밤색 대광주리에 아직 썰지 않은 칡뿌리가 서너 개 담겨있었다. 엄마가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몸뻬 차림으로 호미와 낫이 담긴 광주리를 끼고 나가 종일 뒷산을 헤매어 캐낸 그것들이었고, 엄마의 차림은 그대로였다.

  내가 책 보따리를 등짝에 대각선으로 맨 채로 그 곁에 쪼그려 앉으면, 엄마는 자꾸 가라고 손사래를 쳤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말끄러미 앉아 있었다. 그 앞을 오가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힐끔힐끔 구경만 했지 칡을 사는 아이는 좀체 없었다. 어쩌다 서너 개나 대여섯 개를 1원이나 2원에 팔면 엄마는 다시 칡을 도마에 올려 썰었고, 자투리가 된 작은 조각을 내게 주었다. 나는 그것을 오래도록 맛있게 씹었다. 지나는 사람들과 주변을 살피다 고개를 들면 쏟아지는 햇살이 눈 부셔 현기증이 일었다. 

  전봇대 그림자가 느린 시계바늘처럼 움직여 자리를 바꾸면 학교 담벼락은 그늘이 되었고, 엄마는 간혹 등허리를 두드리며 쉬이이 새소리 같은 한숨을 쉬었다. 누나는 한 번도 엄마의 도마에 가까이 오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 지나가는 누나를 보아도 엄마는 모른 척 했다. 나도 처음엔 멋모르고 누나! 큰 소리로 불렀다가 엄마에게 등 떠밀려 누나랑 집에 가야했고, 누나가 툴툴거리며 꿀밤을 먹였기에 그 뒤론 보아도 부르지 않았다. 어쩌다 같은 반 아이가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했는데, 옷차림부터 다른 아랫동네 아이들과 산동네 아이들은 별로 친하지 않았다.

  어떨 때는 아예 퍼질러 앉아 책 보따리를 풀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 교과서는 형이 쓰던 것을 누나가 물려받아 쓰고 다시 내가 물려받았으니 색이 바랜데다 내용도 새 교과서와 많이 달랐다. 메마른 시간이 부스러지는 사이사이 엄마의 기분을 살피려 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 엄마의 눈은 깊은 우물 같았다. 그렇게 뭉그적거리고 있으면 아주 드물게 엄마가 몇 번을 망설이다가 몸뻬 속에 손을 집어넣어 1원짜리 지폐 한 장이나 10환짜리 동전(화폐개혁 이후 1원짜리로 통용됨) 하나를 주었다. 그러면 나는 의아한 눈길을 거두면서 가슴부터 콩콩 뛰었다.

  먼저 대뜸 떠오르는 건 오뎅, 만두, 찐빵이었다. 아니 그것들은 항상 머릿속에 들어차 있었다. 그것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다른 아이들이 그런 것을 사먹을 때 나는 되도록 그 근처에 가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했다. 뗄 수 없는 눈길과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슬펐기 때문이었다. 유리구슬이나 딱지 같은 것도 생각났지만 차마 그런 데다 돈을 쓸 수는 없었다. 마음으로 온갖 것들을 사고 먹고 가지고 놀다가, 결국 전과 마찬가지로 만화방으로 갔다. 

  길 건너 문방구 옆, 좁은 나무계단을 삐걱거리며 내려가면 비좁은 만화방이 있었다. 1원을 주면 도장이 찍힌 작은 표 12장을 주었고, 표 한 장을 내면 만화책 1권을 볼 수 있었다. 보고 싶은 만화책은 무진장 많았지만 나는 서너 권만 보고 다음날을 위해 표를 아껴두었다. 좁고 긴 나무의자에 앉아 글과 그림을 알뜰히 살피며 푹 빠져들었다. 표가 다 떨어졌을 때는 나오기가 아쉬워 다 본 것을 다시 보기도 했다. 내가 사는 산동네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만화를 보고 나면 괜히 마음이 벌렁벌렁했다.

  해거름 녘이면 엄마는 머리에 썼던 수건을 빙글빙글 돌려 똬리 틀어 머리에 얹고 칡과 도마를 광주리에 담아 이고 종종걸음으로 앞장서 갔다. 광주리를 손으로 잡지 않고도 엄마는 흔들림 없이 걸었는데, 잔잔한 강물 위를 떠가는 작은 배처럼 광주리는 엄마의 머리 위에서 일렁거렸다. 그 앞으로 해가 지고 있어 엄마의 뒷모습은 누르스름한 빛으로 둘러싸여 환한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그림 같았다. 나는 엄마의 기다란 그림자에 묻혀 바투 걸었다. 가파른 언덕과 계단을 오르면서도 엄마는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세상에서 엄마가 최고로 좋았다.     

  그 산동네는 사라졌지만, 엄마는 그 모습 그대로 내 기억 나무에서 가장 빛나는 열매가 되었다. 열악했던 젊은 날부터 내 삶의 분수령이 있을 때마다 떠오르는 엄마 모습은 마법 같은 힘이 되고 꿈이 되었다. 꿈이 끝나지 않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 손자도 기억 나무가 자라기 시작할 텐데 어떤 기억들이 열리게 될까. 아무리 힘들어도 제 힘으로 떳떳하게 일어서라고 몸으로 가르친 증조할머니의 모습을 옛날이야기처럼 전해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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