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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양섭 Nov 19. 2022

저무는 길가에서

  이보시게, 친구! 먼저 가버린 줄 알고 놀랐지 않나. 그래, 어딜 그리 다녀오셨나. 여기보다 좋다고 자랑하던 데 가보니 과연 그러하던가. 어디든 처음 가보면 경치야 좋을지 몰라도, 눌러살기에도 좋을까. 설마 풍문을 곧이 믿었던 건 아니겠지. 한때는 어깨다툼도 하고 대거리도 했던 길벗이 불현듯 궁금해지는 건, 새삼 외로워져서라기보다 함께 지나온 날들이 그립고, 이젠 무슨 말인들 통하지 싶은 정 때문 아니겠는가. 길에서 만나는 이 많아도 속내 열어놓고 무람없이 얘기 나눌 이 몇이나 될까.

  해가 자못 기울어, 뒤처진 그림자가 뒷덜미를 당기네. 여기 품 넓은 나무 그늘에 잠시 쉬며 모처럼 얘기나 좀 나누세. 이만치서 지나온 길 한번 돌아보면 갈 길도 다시 보이지 않겠는가. 여태 참 부지런히 손발 나부대며 쉼 없이 왔네, 그려. 바람이 선선해졌구먼. 뜨겁던 여름날도 눈보라 치던 겨울밤도 엊그제 같은데, 또 계절이 바뀌고 있네. 지난 세월은 오는 길에 뚝뚝 떨어져 추억 알갱이로 빛나네. 아, 이리 은발이 되었으니, 세월이 같이 오기도 했구먼. 뭐, 주름진 미소랑 어울려 괜찮아 보이네.

  아니, 등짐이 언제 또 이리 많아졌나. 시장에서 판 벌였다 일어날 때마다 내 것이라고 챙기면서, 필요보다 아까워서 넣은 게 더 많구먼. 짐에 치여 다치고선 욕심 비운다고 했던 때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 모양일까. 이건 누구 줄 거고, 이건 품앗이고, 딱히 내 것이랄 건 없지 않나. 이것저것 미련 가지다가는 거기까지 가서도 꼴사납게 잔뜩 지고 있겠네. 지나온 날들 돌아보면, 짐 구하고 잃고 찾고 꾸리고 지느라 얼마나 더 고된 길이 되었던가. 남만큼만 하려 했는데 늘 남의 짐이 더 많아 보였지.

  자식에게 넘겨주면 마땅히 제 것이려니 하겠지. 제 손까지 온 과정의 소중함은 모르고, 무거운 걸 가벼이 여기지는 않을까. 넘쳐도 더 채우려 하며 편리와 속도에 얹혀 가면, 제 길을 찾는 재미를 어찌 알까. 도구가 무기가 되기도 하고 스스로 다치게도 되는 이 여행의 이치를 일러준들 알아들을까. 제 몫의 경험으로나 배울 테지. 그냥 숨탄것들 넘나드는 길섶에 자식 먹이려 아낀 것들 흩치고 가야겠네. 풀꽃들 피고 지고 산새들 둥지 트는 숲속에, 나그네가 나눈 먹거리도 순환의 흐름에 보시가 될까.

  길을 비켜 길을 보니 길이 많기도 하네. 앞만 보고 재우쳐 가는 사람들, 가는 곳은 같을 텐데 제각기 다른 길에서 시간을 다투고 있구먼. 그러거나 말거나 비켜선 김에 자네랑 한 잔 취해 한바탕 춤이나 추면 어떠랴. 우리도 한철 힘 넘쳤던 그때는 뭐에 그리 휘둘려 쫓고 쫓기기만 했을까. 숱한 길이 갈라지고 또 만나도 내가 선택한 길은 어차피 혼자 가는 길이었잖나. 열심히 쫓는 이나 쫓기는 이나 발걸음 맞춰 수인사 나누면 그저 길동무일 텐데, 시간도 길도 사람마다 달라서 순간에 어긋나기도 했지.

  이제야 하는 너스레지만, 참 고운 소녀가 있었잖나. 어리던 날, 기적처럼 하늘과 땅을 흔들며 다가와 이내 가슴에 불꽃을 일으켰지. 꽃피는 들길을 걷고 동산에서 별을 세고 함박눈 맞으며 손가락 걸었건만. 거듭 어긋나는 두 사람의 길에 도사린 마군들이 모질게도 방해하더니, 어느 결에 먼 도회의 미로 속으로, 기어이 쫓지 못할 어디론가 데려가 버렸지. 다른 인연을 위해 비켜주기라도 한 것인지, 그때의 모습으로 가슴에 남기 위해서였는지 누가 알겠나. 부디 어디서든 좋은 길로 편히 걷기를…….

  좋잖은 기억일랑 잊어버리라지만 그게 쉬운가. 그때 그 산정의 열매는 유혹이었지. 가까스로 올라간 희열은 순간이었고, 꼭대기에서 열매는커녕 아귀다툼 무리에 밀려 떨어졌을 때, 꼭 죽는 줄 알았지. 자네의 부축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까지 올 수나 있었겠는가, 정말 고마웠네! 나야 사후 약방문이었다 쳐도,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산정엔 열매 없음’ 팻말을 세웠었는데 소용이 되었을까. 경고는 사라지고 또 누군 선동하고 누군 오르겠지. 그때 다친 상처를 자식들에게 보여주지 못한 것처럼 말일세.

  자식 걱정도 이젠 내려놓으려네. 혈연이라는 애착이, 길이 다른 삶을 길들이려 굴레를 씌워놓고 사랑이고 희생인 줄 알았잖은가. 우주에서 가장 경이로운 생명이 우리 몸에 잉태되어, 나고 자란 희열을 뭐에 비할까! 그걸로 충분했고, 다시 생명으로 이어지려니 그저 바라보며 믿고 축복해야지. 부모에게 받은 몇 가지 중에, 무엇이 내게 남았나 보니, 몸뚱이 말고는 보이지 않는 정신뿐일세. 보이는 건 금세 변하고 사라졌지. 인제 내가 주려니 보이는 게 대단찮아, 보이지 않는 걸 전해주기가 더욱 어렵네.

  저, 서녘 어름에 넘실대는 붉은 강이 보이네. 저 강 너머에는 정녕 산 자들의 추측이 나뉘는 어떤 공중누각들이 있을까. 늦게나마 삼업의 죄를 씻으려 애를 썼다지만, 행여 저 너머에 다다를 자격이나 될까. 빙빙 도는 영육에서 완전히 떠날 수 있을까. 정화를 위한 불길인 양 이글거리는 석양을 향해 헤엄쳐 건너간 이들은 사자를 만났으려나 아무런 소리도 몸짓도 없네. 그래, 여기선 알 수가 없구먼. 설령 가늠치 못할 거리와 시간이 남았기로서니 어디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바람이 앞서 지칫거리네.

  바람에 매달릴 순 없으니 그만 일어나세. 시간만이 여전히 등을 떠미는구먼. 어둠에 묻히기 전, 맑은 정신으로 저 강에 닿아야겠지. 잔광이 아른거리는 물결 아래엔 뭐가 있을까. 아직 자맥질할 힘은 남았지 않나. 이탈하진 않더라도 이제 남은 여정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가면 어떨까. 강바닥에 숨은 길을 더듬다가 숨 막힐 때 떠올라 눈뜨면, 돌연 경계가 지워져 있을지 몰라. 가다가 서로 잃어버려도 그냥 그러려니, 씩 웃으며 찾지는 않기로 하세. 내 안의 친구와 너무 늦게 교감해 아쉽지만 어쩌겠나.

  산도 들도 색이 바뀌었네. 계절의 순환은 한결같은 스승이었지. 이생의 흔적이 다 지워질지라도 이것만은 알아주시게. 늘 이어진 지금, 여기, 자네와 내가 함께 살아있으매 한 생이 충만이었음을! 필연이든 허상이든 마음에서 시작되었을진대, 제때제때 감성과 이성이 교차하였기에 이 여행길이 사람의 삶이었다네. 자! 늘 어긋났던 얼굴을 마주 보고 한번 안아주시게, 따뜻하고 차가운 사람아! 우리가 손잡으면 마지막 사랑은 완성될 터이니, 이제 병상에서 꿈꾸는 육신의 가슴으로 돌아가 미소짓게 하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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