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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양섭 Nov 01. 2024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강둑에 올라서니, 강물과 하늘가를 태우는 불꽃 노을이 펼쳐져 입이 헤 벌어진다. 때가 마침 맞았다. 노을은 하루의 소멸 의식 같아, 내 가슴까지 불그레 뭉근해진다. 

   곧 사라질 빛살들이 춤추는 물결, 반짝거리는 윤슬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윤슬 위 사장교의 주탑과 강변로의 차들과 움트는 가지에 고루 얼비치는 황금빛이 은은하다. 내 옷깃을 물들이던 주황빛은 사부자기 내리는 어둠에 묻혀 사그라진다. 사위가 고즈넉이 어두워지니 강 건너 건물들의 불빛과 대교를 휘감은 조명이 우쭐우쭐 밝아진다.

   희읍스름하던 구름도 어둠에 묻히고 달과 별은 보이지 않는다. 어둠이 더 짙어지면 슬쩍 드러날는지 모르겠다. 색이 바뀌는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원앙새 두 마리가 물살을 거스르며 일으킨, 결이 다른 잔물결이 부채꼴로 번져 지워지고 또 생긴다.

   가로등이 켜진 산책로를 걷다가 괜히 아쉬워 돌아보니 노을도 윤슬도 흔적조차 없다. 까아아, 강기슭에서 이름 모를 새가 그림자처럼 날아오른다. 차지 않은 바람이 봄이 왔다며 귓불을 스친다. 누가 세월은 강물처럼 흐른다고 했던가, 정말 그러한가?     


   사람이 인식하는 시간은 답의 뒤에 답이 또 있는 수수께끼 같다. ‘수평적 시간’에 ‘수직적 시간(시각)’이 섞이니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와 비견되는 서양의 개념으로, 양적으로 균등하고 물리적인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과 질적으로 의미 있고 주관적인 ‘카이로스(Kairos)의 시간’ 또한 현실에서 딱 구분 짓기 어려워 헷갈리기도 한다. 

   그런데 낙조와 강물을 보다가 문득, 시간(세월)이 지나간다거나 흐른다는 생각이 언제부터 굳어졌는지, 그 말이 과연 사실인지, 또 수수께끼처럼 머릿속을 뱅뱅 돈다. 산책은 늘 생각을 동반하는데, 오늘은 느닷없이 시간을 화두 삼아 씨름하게 생겼다.

   세월을 강물이나 화살과 비교하다니, 이는 관점의 착오에서 비롯되었다는 어깃장이 수수께끼를 헤집는다. 시간(세월)은 천지와 자연의 현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다. 시작도 끝도 실체도 없는 상태 그대로, 공기처럼 하늘처럼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중심적 인식으로 시간이 빠르게 또는 느리게 지나간다고 느낀다. 가만히 있는 시간이 속도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주객전도는 무릇 시계와 달력 때문이지 싶다.      


   시간은 태초부터 이미 충만해 있다. 사람만이 분별하는 과거 현재 미래가 시간에 있을 턱이 없다. 삼라만상은 무한한 시간 안에서 길고 짧은 차이의 한계를 갖고 생겨나 움직이고 변화하며 존재하다가 소멸한다. 사람이 만든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생물과 무생물뿐만 아니라 태산과 바다와 심지어 하늘의 별까지도 그렇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시간과 세월에 사람은 크고 작은 눈금을 매겨 놓고, 쫓아가면서 되레 시간이 간다고 한다. 자신이 빨리, 천천히, 혹은 잠을 자면서도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데, 눈금을 뒤로 밀어 내며 줄곧 나아가면서, 환경 요소인 시간이 빠르다니 느리다니 한다. 기차를 타고 철로가 간다고 하고, 차를 운전하며 길이 빠르니 늦니 하는 꼴이다. 길은 멈출 수도, 돌아갈 수도 있지만, 시간은 찰나도 설 수 없는 일방통행이다.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에 실려 간다면, 나는 누가 만들어 띄운 종이배인가? 바람에 날려 떨어진 가랑잎인가? 천만에! 나는 배의 주인이다. 속도와 방향을 조종하며 고기를 잡거나 무엇을 옮기기도 한다. 이런 능동성은 시간에 대한 경외감을 달리한다. 강물과 근본이 다름에도 시간이 흐른다는 오해는 ‘자연의 시간’보다 ‘시계와 달력의 시간’에 길들었기 때문이며, 도구화된 그 시간을 제때 잘 쓰려는 욕심 때문이지 싶다.     


   본래 있는 그대로, 그러니까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을 ‘모두의 시간’은 극복이나 컨트롤의 대상일 수 없었을 터이다. 하지만 인간은 바퀴를 고안해 수레를 만들고 톱니바퀴로 시계를 만들어 내고부터 속도와 시간을 재게 되고 ‘인간의 시간’이 따로 시작되었다. 속도(욕구)는 시간에 대한 도전이 되고, 시간은 시간을 재는 도구가 되었다.

   일정한 거리를 빨리 가서 시간을 줄였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착각이다. 속도 경쟁에서 남을 이겼어도 시간이 줄거나 늘어나진 않는다. 세 시간 뒤, 한 달 뒤, 내년 설날 등으로 금 그어진 미래에 남보다 먼저 도착할 재간은 누구에게도 없다. 다만 눈금 사이의 시간을 남보다 알차게 사용하면 그 시간에 다른 일을 더할 여지가 생긴다.

   그러니까 단절되지 않는 시간은 도구가 아니라 자원으로 활용하기에 따라 뒤로 밀려가는 눈금에 남겨지는 성과나 흔적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결코 되돌리거나 거스를 수 없다. 다만 앞으로 가면서 만나고 지날 시간에 일어날 일과 성과와 연결된다.     


   시간이 지구를 돌리지 않고 나무를 키우지 않듯이, 일의 성취도 시간이 만들지 않는다. 시간을 활용한 사람의 노력과 인내의 결과다. 그런데 시간에 감사하기보다, 시간 탓을 할 때가 훨씬 많다. 시간을 고마운 자원이 아닌 도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도구로 삼는 위험한 경구로 ‘시간은 돈이다’를 들 수 있다. 인간은 생활의 편리를 위한 도구로 돈을 만들었는데, 외려 그 돈에 옥죄이거나 노예가 되기도 한다. 시간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말일지라도 돈과 비교하다니, 있는 하늘을 만든 연못에 비교하는 꼴이다. 도구에 빠져 피폐해진 삶은 후회하면서도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다.

   시간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돈과 엄연히 다르지만, 지나치게 인간의 잣대로만 재면서 도구화 삼으면 옥죄이거나 쫓기는 위험이 도사린다. 아무 잘못도 없는 시간과 싸우려 들면 이기기도 힘들지만, 그로 인해 놓치는 것이 더 많아진다. 시간은 사용에 따라 축복이기도 하고 함정이기도 하다. 개개인의 잘잘못과 큰 상관없이도 사건 사고와 희로애락이 꼭 ‘그때’ 일어난다. 하필, 마침, 우연도 시간이 일으키는 마법이다.     


   메모하느라 자주 멈추어서 다른 날보다 한참 걸린 산책로를 되돌아 걷는다. 시간은 두 배를 썼어도 거리는 같다. 대신에 그 시간에 골몰하여 얻은 생각이 남겨진다.

   올 때 노을을 보던 자리에 다시 선다. 어둠만이 자욱한데 다리의 조명이 강물에 빠져 남실거리고, 강 건너 불빛들이 어리어리하다. 까아아, 컴컴한 강기슭을 들썩인 새소리는 그림자처럼 날아갔던 새가 돌아온 기척일까. 올려다보니 별 몇 개가 기다렸다는 듯 반짝인다. 아까 그 자리라지만, 100분의 시간을 지나왔기에 이미 그 자리가 아니다. 그때의 공간은 시간의 눈금과 같이 뒤로 사라져 갔고, 지금의 공간이기에 배경이 변했고 풍경이 다르다. 그만큼 시간과 공간은 서로 유기적이며 끊임없이 바뀐다.

   유무형의 존재들은 무한한 시간의 극히 일부를 지나며 늙거나 낡아져 사라지지만, 매 순간 맞닥뜨리는 시간과 공간은 늘 바뀌기 때문에 새로운 미답이다. 짧은 눈금을 바투 지나면서는 작은 변화를 알아채지 못해 무덤덤해도, 시간 눈금의 간격이 길수록 변화는 엄청나다. 자연의 시간은 별들과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지만, 인간의 시간은 생산과 속도와 편리를 위한 바탕이자 기준이 되어 급속도로 환경을 변화시킨다.     


   자연의 시간 변화에는 다른 자연물들처럼 순응하는 사람이, 인간의 시간이 일으키는 변화에는 허겁지겁하거나 뒤처진다. 편리해진 도구에 끌려가는 꼴과 마찬가지다. 현대인은 자연의 시간보다 인간의 시간에 길들어 사는데, 자신은 시간과 반대 방향의 경험치에 얽매여 고리타분해지면서 시간의 본성인 늘 새로움에 동화하기는 어렵다.

   실제 시간의 효용은 때마다, 개인마다, 체감하는 양과 질이 다르므로 극히 주관적이다. 그것은 획일적인 시계의 시간으로 객관화할 수 없고, 단순히 비교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시간은 주관적 판단에 의한 ‘개인의 시간’과 객관적 기준인 ‘사회의 시간’이 양면으로 섞여 나가며 필요한 목표와 성과를 이뤄 내는 구조이다.

   시간을 쪼개고 쫓기는 조바심은 눈앞의 목표에 급급한 인간의 시간에 맞춰진 속박에서 시작된다. 몸이 가야 하는 시간과 마음이 가고픈 시간을 나눠 생활의 일부라도 자연의 시간에 기대면 그만큼 자유로워지지 싶다. 1초도 건너뛸 수 없는 시간을 몸과 마음이 또박또박 가고 있는 지금 여기가 내 삶의 정점임을 새삼 깨닫는다. 나이를 막론하고 정점은 늘 새 시간으로 옮겨 가며, 기회 또한 내가 다가갈 앞의 눈금에 있다.     


   귀갓길에 늘 보던 운동기구와 벤치와 나무들이 새로이 반갑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다가 눈을 끔벅인다. 어젯밤과 똑같은 집 안이 생뚱스레 낯설다. 그래, 어제와도 오늘 아침과도 같지 않음을 이제 안다. 이 집 또한 우리 식구와 같이 15년 세월을 지나왔고 매일 변한다. 오래된 가구와 전자제품, 정리 못 한 책상과 책장, 수집품들, 버리지 못한 옷들, 꽉 찬 냉장고와 주방용품들···. 제 역할을 하거나, 역할이 끝났거나, 쓰임을 기다리거나, 다 같은 시간대에 있지만, 왔던 때와 갈 때는 제각기 다르다.

   늘 새 시간에 다가설지라도 사람과 일과 환경은 지나온 시간에서 이어진다. 변화와 새로움은 반짝 흥미를 끌다가 곧 구태가 된다. 정리 정돈은 내 마음가짐과 환경을 지금 지나는 시공간에 최적화하는 방식이며, 잘 맞이하고 잘 보내는 성심의 자세다.

   숨을 참을 수 없고 시각에 멈춰 설 수 없듯, 공기나 시간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시효가 있는데, 미련과 기대 따위로 참거나 미루면 외려 가치를 잃는다. 함께 시간을 지나는 사람에게 하고픈 말도, 전하고픈 마음도 그렇지 싶다.

   뻐꾸기시계가 열두 번 울고 하루의 눈금을 넘는다. 미뤘던 일과 새로 할 일이 머릿속에 들어차 가슴까지 벅차오르는 봄밤이다. 새날에 어제와 달라진 내가 들어선다.     


* 202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 문학창작지원금 선정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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