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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양섭 Nov 01. 2024

하늘 인연설

   청룡의 기운이 온다며 떠들썩하게 맞은 새해도 그새 석 달이 지나가네. 용띠 친구들 카톡엔 꽃피는 사진이 뻔질나게 올라오는데, 나는 겨울이고 봄이고 멱살이라도 잡아 며칠이 못 가게 막고 싶네. 제발, 청룡뿐 아니라 천지신명과 오만 신들에게 손 모아 빈다네! 부디, 기적을 내리시어 전처럼 마주 앉아 웃고 떠들게 해 주시기를···.

   우리, 깨복쟁이 때부터 삼총사였잖아? 아직 한참 그렇게 어울려 살 줄 알았는데, “며칠 안 남았대···” 장난치듯 말해 놓고 장난이 아니라니! 기가 막혀 숨도 멎었지. 그 지경까지 나한테 쉬쉬해서 더 야속했지만, 캐묻지 못한 날 탓해야지···. 웃긴 왜 웃어? 달관이라도 한 거야? 농담마저 멋쩍었어. 인제 면회도 오지 말라니, 자네가 나라면 안 오겠나?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자주 멍해지는데, 자꾸 옛날 생각이 나더라.

   자네도 기억하지? 5학년 때, 섬강에서 물놀이하다가 내가 쥐가 나서 막 허우적거리는데, 영복이는 사람 살려! 소리만 질러대고 자네가 헤엄쳐 와서 날 구했잖아. 내가 매달려서 자네도 무지 겁났을 텐데, 용케 날 밀고 나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네! 물밑에서 뭐가 막 잡아당기더라고. 자네 아니었으면 나는 12살에 황천길 갔겠지.

   지금은 자네가 빠져서 허우적거리는데, 내가 들어가 자넬 끌고 나와야 하는데, 어찌 해 볼 수가 없네···. 이제야 생각해 보니 자네한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더라. 이래저래, 자네 마음 몰라준 생각도 나고 해서, 편지라도 써 보려는데 턱턱 막히네.     


   세상에서 가장 오묘하고 알 수 없는 게 인연 같아. 내가 이 세상에 온 것도, 부모 형제와 처자식 만난 것도 다 하늘이 맺어 주셨구나 싶어. 나의 첫 번째 친구인 자네도 마찬가지야. 낯간지러워서 말은 못 했지만, 내가 부족하고 불안하니까 하늘이 자네를 내 친구로 보내주셨구나, 그런 생각도 했었어.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하다네.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는 추억들이 질리지 않는 옛날 영화 같아! 다투거나 섭섭했던 기억은 별로 없고, 서로 쿵짝이 맞아서 재미있었던 기억이 많으니, 우린 그럭저럭 잘 살아온 거야, 맞지? 물론 힘들 때도 늘 같이 의논하고 그랬으니까.

   어릴 때부터 자넨 참 어른스러웠어.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공놀이하다가 교실 유리창이 와장창 깨졌지. 선생이 노발대발했고, 다들 슬금슬금 고개 돌리는데, 자네가 쓱 “제가 그랬습니다!” 그때, 진짜 멋있었어! 할머니랑 둘이 사는 영복이가 기죽을까 봐 대신 나섰다는 거, 나중에야 알았지. 영복이 할머니가 파는 나물도 자네가 자주 샀다며? 가난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나 영복이는 자네 아니었으면 왕따가 되었을 거야.

   자네와 영복이는 인문계로 가고, 나는 농고로 가서 더 의기소침해졌지. 그런데 체구도 작고 자신감도 없는 나한테 자네가 권투를 해 보라 했잖아? 나, 악착같이 운동했어. 꼭 올림픽 금메달 따서 자네한테 자랑하고 싶었는데, 태릉선수촌에서 팔을 다치는 바람에 꿈이 깨졌지. 그래도 그 덕에 누구랑 싸워도 안 진다는 자신감이 생겼어.     


   그냥 웃자고 묻네만, 자네도 옥순이 좋아했었나? 내 아내가 단순한 건 알지? 전에 자네가 자길 좋아했다고 우기더니, 지금 훌쩍이면서도 그러네. 세월 다 지난 내막을 설명할 수도 없고, 그리 믿게 두지 뭐. 고등학교 때 내 가슴에 박혀 버린 옥순이는 애달픈 짝사랑이었지. 퇴짜 맞고 상처만 입을까 봐 말도 못 할 때 자네가 용기를 북돋워 줬고, 먼저 만나서 날 올림픽 금메달감이라고 추켜세웠잖아? 셋이 어울리다 자네가 빠졌고. 자네가 연출한 그 작전 덕분에 나는 신랑이 됐고, 자네는 사회를 봤지.

   어디 그뿐인가? 같이 운동한 애들이 이상한 조직에 들어오라 유혹했었는데, 자네가 펄쩍 뛰며 말려서 끝까지 뿌리쳤다네. 옥순이가 권유한 조리사의 길을 걸으며, 따로 야간대학 다닌 공부도 친구에게 걸맞은 친구가 되려고 애쓴 거야. 자네 둘이 우리 식당에 와서 “와! 권투선수가 해 주는 요리, 최고다!” 하는 소리를 꼭 다시 듣고 싶네.

   나만큼 영복이도 자네에게 신세를 지고 영향을 많이 받았지. 그런데 어째서 자네는 친구 도움을 통 받지 않으려 했는지 참 답답했네. 영복이가 행정실장으로 있는 대학에 진작에 입찰만 넣었어도, 코로나 때문에 있던 주문도 다 떨어졌다던 자네 인쇄소가 그리 힘들지는 않았을 거 아냐? 자네가 술자리에서 한 말은 지금도 생생하네.

   “친구끼리는 거래하는 거 아냐. 우정이 깨질 수도 있으니까··· 돈이 중요하냐? 의리가 중요하냐? 야, 친구야! 돈은 흘러가는 물이고, 의리는 산이다. 우리 고향 뒷산!”     


   고향 뒷산은 우리 놀이터였지. 그 산처럼 양보하고, 챙겨 주고, 무던히 살아온 자네한테 왜 이런 아픔이 왔을까? 이런 게 운명일까? 그래, 하늘이 맺어 주고 떼어 가는 때에도 하늘의 뜻이 있겠지. 가족들도 이제 자네의 역할에 기대던 때와 달라지는 운명의 길로 가겠지. 인연으로 인한 애착과 희생과 염려도 인연이 다하면 놓을 수밖에. 자네는 이미 그렇게 수긍해서 그토록 초연하신가? 나도 감정을 가라앉히고 보니, 자네나 나나 별 차이가 없는, 평범한 이만큼의 한 생도 그저 다행이고 감사하다 싶네.

   어차피 조금 길고 짧은 차이뿐 누구나 한번 왔다가는 인생인데, 올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뚝 떨어져 왔지만, 갈 때는 지난날을 돌아보고 갈무리를 할 수 있잖아? 그것도 아무에게나 허락되지는 않는 듯하니, 영혼이 몸과 분리되기 전에 한번 해 보시게.

   이번 생에서 무얼 찾아 얼마나 얻었고, 뭘 이루느라 뭘 놓쳤는지, 누구에게 신세를 졌고, 누구를 힘들게 했는지, 타인을 얼마나 들여다봤는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였는지, 버릴 것과 남길 것은 무엇인지, 다른 세상에서라도 보고픈 사람은 누구인지··· 아! 이건 글쎄, 내가 괜히 감정이입이 되어 주절거리고 보니 다 세속적인 소리네.

   그런 생각들은 싹 흘려버리시게. 잘잘못이나 아쉬움도 털어야 할 짐일 뿐이야. 지금은 더 가벼워지게 비우고 맑히는 데에 정신을 모아야겠지. 이제 기뻤던 순간, 벅찬 감동, 아름다운 장면, 사랑과 정, 그것들을 결정으로 영글어 영혼에 갈무리하시게. 어쩌면 다음 생이 정해질 때, 영혼에서 반짝이는 결정들이 방향을 잡아 줄 거야. 세상이 바뀌어도 그때 인연의 흔적과 공덕은 그 결정들의 빛으로 이어지리라고 믿어지네.     


   이제 자네가 갈 천상계에 대해 들은 얘기에 내 상상을 보태 그림을 그려 보겠네. 자네의 영혼이 얼결에 옮겨지기보다 상상과 기대를 하며 가라고 덧붙이는 가정이니, 자네가 가서 보고 내 말이 맞는지 뭐가 다른지, 꿈에라도 나타나 일러 주면 고맙겠네.

   졸음이 쏟아지는 나른한 상태로 하얀 커튼이 하늘거리는 경계의 통로를 지나게 될 거야. 거기서 사자가 나타나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당기는 힘 때문에 갈팡질팡하다가 어딘가로 끌려가고, 아주 드물게 돌아오기도 한대. 자네야 별로 방해받지 않을 테니, 그대로 바람결에 부유하듯 나아가면, 소실점처럼 보이던 둥그런 문이 점점 다가와서 형태도 없이 환하게 열린다네. 화사한 빛무리 속으로 들어서면 수많은 꽃이 흐드러진 길과 연노랑 빛살들이 아롱대는 눈부신 하늘이 펼쳐져 있어. 상큼한 향기가 번지고 천상의 음악이 은은히 들릴 테지. 날개 달린 작은 천사들이 마중 나와서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춤을 출 거야. 아름드리나무에 색색의 열매 사이로 새들이 지저귀지.

   자네가 마법 같은 황홀에 빠져들어 이승의 기억을 싹 잊으면 그걸로 끝이야. 하지만 간직한 결정들의 빛에 떠오른 기억을 붙들면, 거기에 그리운 사람들이 온화한 얼굴로 나타나 손 내밀고 안아 줄 거야. 이승에서 못다 한 인연들일 수도 있고, 새로운 인연일 수도 있는데, 그런 구분이나 분별조차 의미가 없지. 거기는 물질계가 아니니까 의식주도 없고, 시간과 공간이나 관계의 개념도 없을 테니까. 아마 마음으로 뭐든지 움직여지고, 순간이동으로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부를 수도 있을 거야. 다만 천상계의 차원이 아닌 세계에서는 자네의 실체가 실현되지 않을 테니 상대는 알아차리지 못해. 물론 자네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있으니 슬쩍 기척 정도는 줄 수 있겠지. 

   그러다가 다시 이 세상에 오고 싶어질지도 몰라. 그러면 자네의 영혼에 씨앗처럼 간직된 결정들이 소리를 내겠지. 그런데 지구별에 새 생명으로 올 때는 그 전까지의 모든 기억이 깡그리 지워진다네. 그런 섭리가 있어 우주는 늘 새로이 돌아가나 봐.     


   자네가 떠나도 나는 여전히 자네와 얘기하고 싶고, 같이 고향 뒷산이나 어디 놀러도 다니고 싶겠지. 자네는 언제든 어디든 나타나서 나를 볼 수 있으니, 내가 생각만 해도 곁에 있다고 믿겠네. 봄날엔 아지랑이로, 여름엔 단비로, 가을엔 낙엽으로, 겨울엔 눈송이로, 자네는 천변만화의 모습으로 오겠지. 등산길에 나뭇가지가 옷깃을 당기면 나는 자네의 장난을 알아챌 것이네. 그런 날이면 하늘을 보며 씩, 웃어 드릴게.

   자네 덕분에 두 번 사는 나의 이생은 더없이 고맙고 기꺼운 축복이었어! 벌써 20년이 흘렀네! 내가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맬 때, 꼭 잡아 준 가족과 자네의 손을 잊지 못하네. 그 덕분에 막막하고 하얀 경계의 통로에서 나는 기어이 돌아 나올 수 있었다네. 그때 아득히 보고 느낀 장면을 이렇게 자네에게 전할 줄은 몰랐네.

   자네를 고향 뒷산 아름드리나무까지 배웅하고, 자네가 간 곳을 모르는 사람들의 슬픔은 내가 다독일게. 그리고 머잖아 따라갈 테니, 거기서 내게 들려줄 얘깃거리 만들며 놀고 있다가 환히 반겨 주시게. 거기서 보아 여기 사정이 좀 안타깝더라도 이미 다른 세상의 일이니 그저 인연 따라 흘러가게 두시게. 온 우주가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세계의 일에 관여하면 또 다른 세계로도 이어진 하늘의 뜻이 복잡해지니까.

   먼 여행을 준비하기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며칠! 쇠잔해진 몸을 벗을 때, 고맙고 미안해서 매우 힘들 거야. 내가 손잡고 있을 테니, 넌지시 끄덕여나 주시게. 


* 202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 문학창작지원금 선정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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