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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테이블 신사분이 삼겹 10인분 보내셨습니다.

by 위키워키

집 근처에 고깃집이 생겼다. 늘 문전성시인 이유는 대문짝만하게 적힌 '1인분 3500원'이라는 무지막지한 가성비 때문만이 아니었다. 쥐똥만큼 주고 20인분 먹게하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먹성 좋은 우리 부부도 5인분(500g) 먹고 나면 배가 불러 더 못 먹을 정도가 된다. 바로 무한리필 채소 덕분. 상추, 깻잎은 기본이고 당귀, 봄동, 고사리, 파김치 등 고급템들이 금방이라도 밭으로 돌아갈 신선함을 자랑한다. 어느새 채소를 더 많이 먹은 것 같아 죄책감도 덜 수 있다.




지나치지 못하는 방앗간이 되어버린 이 가게를 찾은 어느 저녁, 마주 앉은 남편이 먹다 말고 자꾸 왼편을 곁눈질 하고 있었다. 덩달아 오른편을 보니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고기를 굽는중이었다. 교복을 입었으니 최소 중학생 이상인데, 저마다 덩치 차이가 많이 나고 변성기가 채 오지 않은 아이들도 있는 걸로 봐선 갓 중1 정도 것 같았다.


"쟤네 엄청 귀여워."


셀프바에 갔던 남편은 다섯 명중 제일 키가 작아보이는 학생과 동선이 겹쳤는데 그렇게 야무진 아이는 오랜만이라 했다.


"한 두 번 온 게 아니야 쟤네. 쌈이랑 채소를 얼마나 야무지게 담는지."


고양이 쳐다볼 때 빼고 남편이 저리 흐뭇한 미소를 짓는 건 오랜만이라 의아할 정도였지만, 가르치는 일을 하고나서 부터 학생들을 특히 귀하게 여긴단 걸 알고있던 터라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한듯 자리에서 일어난 남편은 카운터로 향했다. 계산을 미리 하는 건가 싶었는데 사장님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 다시 돌아왔다. "옆 테이블 아이들이 10인분 정도면 실컷 먹을 수 있지 않겠냐"며 고기를 사주고싶다 말씀드렸더니 고민하시던 사장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했다.


"근데 .. 쟤네가 먹는 건 우삼겹이예요."


우삼겹이 우리가 먹고 있는 대패삼겹보다 400원 더 비쌌지만 키다리아저씨가 되기로한 남편에게 별 문제가 되진 못했다. 뭐가됐든 먹던 걸로 보내주시라 말씀드리고 돌아온 그의 돌발행동에 살짝 놀랐지만 한편으론 아이들의 반응이 기대되었다.


이윽고 우삼겹 산더미를 가져오신 사장님은 아이들 앞에 내려놓으시며 우리 쪽을 가리키셨다.


"옆 테이블 저 분이 이거 사주신대. 너네 오늘 땡잡았다 야."


어리둥절 하던 아이들은 이윽고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를 하곤 바로 굽기 시작했다. 쌈도 리필해왔고 사장님이 주신 된장찌개까지 더해지자 상이 빈 틈 없이 가득 찼다. 순식간에 동내는 모습을 지켜보니 내 배가 다 불렀다. 남편이 혹시 더 먹고싶은 지 물어보자 한 아이가 대답했다.


"저희 한 접시 더 남았어요.. 이제 괜찮아요!"


서빙되지 않은 5인분이 남았다며 똑부러지게 사양하는 모습을 보니 셀프바에서 야무지게 채소를 담았다던 아이인 것 같았다.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서려다 인기척에 돌아보니 어느새 아이들이 카운터까지 나와 쪼르르 도열 해있었다. 우리가 일어나는 것을 보곤 재빠르게 인사를 하러 온 것 같았고 몇 번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너네 ㅇㅇ중학교지? 많이 먹고 공부 열심히 해라~!"


아재가 된 남편을 데리고 서둘러 나왔다.




"어렸을 때 나도 하도 잘 먹으니 어떤 모르는 분이 사주신 적이 있거든. 얘네도 나중에 누군가한테 갚을 거 아니야."


아주 큰 금액은 아니지만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 고기를 쏘는 남편이라니, 그리고 당연하단듯 지켜보는 나라니. 불과 1~2년 전만해도 상상 못 했을 모습이다. 남편이 대기업에서 지금보다 많은 돈을 벌 때, 나 또한 휴직 전이라 안정적 소득이 있었을 때, 우리가 옆 테이블 아이들을 챙긴 적이, 아니 제대로 바라본 적이라도 있었나? 둘이 마주하기도 어려운 판이라 만났다하면 맛있는 음식들과 술에 취해 일주일간의 회포 풀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때의 칵테일 한 잔과 오늘 아이들이 먹은 10인분의 가격이 비슷할텐데, 그 무모한 흥청망청이 새삼 아찔하다.


"그때보다 많아진 건 시간 밖에 없는데.. 우리 좀 많이 변한 것 같아." 나름 감상에 빠져 이야기했는데 우삼겹 신사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나이. 나이 많아졌잖아."


... 맞다. 이제 그런 술은 그닥 당기지도 않는다. 메뚜기도 한 철이다.


나이와 함께 돈과 시간이 정비례로 늘어가면 좋겠지만 한 가지가 늘었다 싶으면 다른 한 가지를 포기하거나 보내주며 엎치락뒤치락 하게 된다. 그러다 아이들 덕분에 잊고 있던 '마음'의 존재도 되새긴 것 같다. 보이지 않는 만족을 먹고 자라는 마음. 오늘 비싸고 예쁜 술 한 잔보다 훨씬 큰, 나누는 기쁨을 흡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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