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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Sep 27. 2022

결혼은 멋모를 때 하는 거래

첫 집에서의 3년 : 혼자 놀기의 진수

스물일곱, 예식을 앞두고 신혼집을 찾아 나섰다.


남편은 아직 대학원생일 때라 모아둔 돈이 없었고 직장생활 중이었던 나는 5천만 원 정도를 집에 보탤 수 있게 저축한 상태였다. 우리 부모님은 약속대로 내가 모은 만큼의 자금을 보태주셨고 시댁에서도 같은 금액을 도와주시기로 하였다.


감사하 값진 도움이지만, 서울, 수원으로 매일 출근 및 통학을 하니 그 에 집을 구해야 하는 우리 부부에게 여유로운 출발은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왜인지 몰라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불과 5년 전의 나인데 다소 무모했던  같다. 예단 예물 등 모든 절차와 관례를 일체 생략하기로 양가 부모님들께서 마음을 맞추셨기에 집만 구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남편은 당시 바빠서 나 혼자 발품을 팔았고 우리 예산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집을 두 개로 추렸다.


1.  적당한 역세권, 다세대주택 투룸

2.  역세권, 오피스텔 원룸(그나마 복층)


처음엔 1번 다세대 주택으로 마음이 기울었으나 직접 둘러보니 말만 투룸이지 원룸을 쪼개 놓은 격이었다. 당시 거주하던 분들도 신혼부부였는데 각종 살림을 나름대로 배치해두셨더란다. 그러나 워좁다 보니 집이 가구와 가전을 소화하지 못하는 느낌이었고,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움츠리고 걸어 다녀야 할 것만 같았다. 우리도 이 집에 산다면 짐들을 들여놓아야 할 텐데, 이 이상으로 잘 배치하긴 어려울 터였다.


결국 마음을 바꾸었다. 원룸이어서 각자의 공간은 없지만 그 외엔 장점이 더 많이 보였다. 교통이 중요한 우리에게 필요한 초역세권이었고, 새 가전들을 사서 욱여넣느니 낡았지만 빌트인 되어있는 것들을 활용하는 게 나았다. 집주인께서 월세를 반전세로 해주시기로 협상이 되면서 가성비와 주변 환경을 택한 우리의 첫 집은 그렇게 정해졌다.




첫 집에서 3년을 살면서 단점과 장점 모두 극대화되는 경험을 했다.              


대학원생 남편이 새벽에 들어오면 현관 불이 켜지며 온 집안이 밝아졌고 어쩔 수 없이 안대와 귀마개를 365일 착용하고 자야 했다. 복층에 매트리스를 두고 자다 보니 화장실을 갈 때마다 천장에 머리를 박기 일쑤였다. 요리를 해 먹고 나면 오피스텔 특성상 창문 개폐가 제한적이어서 한동안 냄새 빼는데 공을 들였다. 심하게 싸워서 혼자 있고 싶은 데 갈 곳이 없어 더 화가 났고, 싸우고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사는 남편의 모습을 강제로 시청해야 하는 것은 가히 고문에 가까웠다. 냉장고는 연식이 오래되어 수리해도 계속해서 문이 열렸고, 어쩔 수 없이 여닫을 때마다 테이프를 뗐다 붙였다. 에어컨에서는 물이 떨어져 소파 등받이와 내 정수리를 향했고, 그나마 그 소파는 온라인 최저가 템답게 2년 차쯤부터 우리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곱씹어보니 자잘한 불편함이 적진 않았으나 쉼 없이 행복해지고자 노력했다. 


더 열심히 살고 노력하면 꿈꾸던 행복이 찾아오리라 믿었다. 내가 생각했던 신혼의 행복이 충족되지 않아 많이 허전했던 시기였기에, 사소한 불편함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같다.




좋은 점을 돌이켜보면, 우리의 첫 집은 창 밖 풍경이 예뻤고, 혼자 있기엔 작은 공간이 아니었다. 집 앞 하천을 달리고 늦은 밤까지 산책해도 될 만큼 치안이 좋은 곳이었고, 대중교통이 편리하니 적극 활용해 주말에는 영어학원에 다니고 문화센터 수업을 수강할 수 있었다. 남편은 새벽이 되어야 귀가하기 일쑤여서 책 읽고, 그림을 그리거나 와인을 마시고, 좋아하는 미드를 보면서 여유로이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혹은 직장동료들,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놀고 마셔도 남편은 그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내가 무얼 하기에도 좋은 환경이자 상황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켠 항상 허전했다.

매일 밤, 작은 밥상 위 펼쳐놓은 혼자만의 세계


결혼은 했지만 항상 혼자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박사과정 중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되뇌다가도 남편에게 쌓인 서운함은 가끔 '크게' 폭발했다. 미치겠는 건, 내가 선택하고 내가 이끈 결혼이니 탓할 사람도 없었다는 거다. 대체 왜 이렇게 이른 나이에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결정했을까 스스로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좀 더 갖추고, 더 준비되었을 때 또래 친구들이 그렇듯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래서 결혼은 멋모를 때 하는 거라는 말이 있는 걸까.


내가 꿈꾸던 신혼의 행복은 별 게 아니었다.


각자 열심히 살고 이 집으로 돌아와 맛난 한 끼를 먹으며, 하루를 공유하고 내일을 기약하는 것.


커녕, 서로 카톡 한 통조차 하지 않는 날이 많았고 생사확인은 집에 들어왔는지 아닌지로만 확인 가능했다. 내 역할을 찾고 싶어 한동안은 어려서 본 엄마의 역할을 따라도 해보았다. 남편의 영양제를 챙기고, 삼계탕도 끓여보고, 제철 나물을 무쳐놨다가 맛보게 했지만 번번이 내가 원한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생스럽게 이런 거 하지마, 난 원래 집에서  안 먹어"라는 무심한 대답.


서로에게 별 기대 안 하는 것이 좋다고 믿는 남편과, 사랑하는데 어찌 서로에 대한 기대나 배려가 없을 수 있냐는 나 사이에는 조금씩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편과 많이 멀어졌다.


나는 비뚤어진 사춘기처럼 속된 말로 밖으로 '나돌았다'. 더 많은 사람들과 놀고, 마시고, 다양한 활동을 하며 살았고 우리의 집은 결국 늦은 밤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텅 빈 집이 되었다.




그렇게 3년이 흐르고 남편은 학위과정 종료 후 S전자 연구원으로 입사가 결정됐다. 남편의 거취가 어느 정도 뚜렷해지자마자 나는 다음 집을 찾아 나서자고 촉했다. 월세가 아깝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리의 관계와 분위기를 대대적으로 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집을 구할 때는 '같이, 함께 발품 팔 것', 그리고 '방이 있을 것'을 우선 조건으로 걸었다.  


3년의 시간이 나에게 알려준 것은, 집은 단순히 잠자고 쉬는 곳이 아닌, 어떻게 살 것인지 주인의 의지와 가치관이 절로, 잔뜩 녹아있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 집, 그리고 신혼생활에 서툴렀던 첫 3년을 졸업하고 이사했다. 내 나이 또래의 아파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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