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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Sep 28. 2022

남편의 이직 - 연구원에서 지방대 교수로

두 번째 집에서의 2년(전반전)

첫 집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내 나이와 비슷한 구축 아파트로 이사했다. 맞바람도 치고, 방도 있다. 남편도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고 우리 생활이 좀 더 행복해질 거라 부푼 꿈을 안고 지내던 차, 남편이 첫 출근한 지 두 달 남짓 되었을까.


이직을 선언했다. 이대로는 못 다니겠다며.


살인적 스케줄을 견디며 학위를 딴 남편이 이직을 결심하게 되기까지, 박사 과정에는 '끝'이라도 있지만 회사 생활에는 별다른 종료 시점이란 게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받은 남편 회사에 대한 인상은, 대우가 확실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성과와 결과를 어떻게든 뽑아내는 곳이었다. 


새벽 6시면 집을 나서서 회사에서 주는 삼시 세 끼를 먹으며 일하다, 밤 11시 반 마지막 셔틀버스로 퇴근을 하면 그의 하루는 끝났다. 몇 시간 뒤면 또 출근이고 주말에도 간혹 나가야 했다. 심지어 주 52시간 제도를 표면적으로나마 위반하지 않고자, 실제 근무한 시간이지만 운동/개인 공부 등을 했다고 근로시간 제외 요청서를 작성케 했다고 한다. (차라리 초과근무 수당을 다 주었다면, 남편이 덜 화가 났으려나.)


우리 결혼생활 측면에서도 그의 대학원 생활 때보다 별반 나아진 게 없었다. 대화는 사치였고 함께하는 평일의 저녁식사는 정말 어쩌다 아주 가끔 하사 받는 선물이었다. 휴가 계획은 남의 일이었고 재테크나 자녀계획 등 거시적 논의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무렵 나의 서운함도 극에 달했다. 대체 결혼을 왜 20대 때 서둘러서 했을까. 결혼식만 올렸지 같이 사는 의미가 없는 데. 몇 년 전, 해외포닥(post-doc) 후 교수 진로를 택하는 것이 어떤지 이미 남편에게 제안한 적 있는데, 그때 진작 마음을 먹었으면 어땠을까, 결국 이렇게 될 걸 등등.


하지만 남편의 이직이 (성공한다는 전제하에) 우리 관계에 있어서도 변화의 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져보기로 했다. 본인의 결정이 일단 우선이기에, 한 번 더 마음을 다잡아 물심양면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회사생활과 이직을 병행하는 남편의 모습은 예상했지만, 짠하리만큼 치열했다. 퇴근 후 새벽과 주말까지도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해야 했다. 당연히(?) 책상이 없기에 좁은 부엌에서 식탁을 가스레인지까지 밀고 그 틈에 의자를 두고 들어가, 몇 시간이고 미완성 논문을 마무리 짓고, 새 논문을 쓰고, 지원서들을 작성했다. 갑자기 지방으로 교수님들을 찾아뵈어 조언을 들어야 하는 상황도 생겼다. 유일한 데이트는 인적이 드문 카페에 가서 둘이 각자 할 일을 하는 것. (하루 종일 앉아있어도 눈치 한 번 안 주시던 사장님께 지금도 너무 감사하다.) 


집에서는 방해될까 조용히 끼니만 챙겨주곤 방에서 넷플릭스를 애용하곤 했다. 혹시 내가 혼자 놀러 나가면 외로울까 싶어 외출과 약속도 최소화했다.




가을이 되고, 얼추 마무리된 지원서들을 접수하는 시기가 다. 교수 사회는 이런 건가. 이 시대에 only 우편 접수라니. 놀라던 찰나, 어떤 학교는 심지어 방문 접수만을 허용했다.


각종 서류 접수는 그래서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낮에 근무하느라 여념이 없는 남편이 우체국에 가고, 대학교에 찾아가 접수 대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휴가, 회사 창립기념일 등을 이용해 열심히 달리고 달렸다.

조수석에 탑승하신 vip(지원서류)


1년 간의 고군분투 끝에, 결국 21년 봄, 남편은 지방의 모 국립대의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월 소득이 줄었다며 머쓱해했고, 주말부부를 하며 옥신각신 다툴 일도 초반에 매우 많았지만, 남편과 알고 지낸 지난 13년간의 모습 중에 가장 온화하고, 안정되어 있다. 시간적 여유가 주는 힘은 어마어마하다. 


결혼 5년 차, 돌고 돌아 '그래 대학생 시절 오빠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싶은 순간들이 다시 찾아왔고, 덕분에 내 삶 또한 변화를 맞이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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