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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Sep 30. 2022

자기 ADHD 아니야?

휴직자의 어쩔 줄 모르는 하루

휴직 후 집에서 오롯이 즐기는 나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첫 3개월은 '잠'으로 점철됐다. 늘어지게 잤다. 6시 반에 일어나던 일상은 10년을 살아도 적응이 안 되던데, 10시가 넘어 일어나는 편안함에는 하루 만에 녹아들었다.


남편이 이른 점심을 먹고 출근하고 나면 적막이 흐르는 집에 혼자 남는다. 동료들이나 친구들은 심심하지 않냐며 걱정하기도 하는데, 정말 괜찮다.


처음엔 무언가 '특색 있고 주제가 있는' 취미나 활동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이것저것 시도하며 손을 댔다. 색연필 그림 그리기, 베이킹, 헬스, 문화센터 기웃대기 등. 다만 내 고질적 문제가 '오래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매우 금방 질린다. 책을 두 장 읽었는데, 갑자기 그림이 그리고 싶어 졌고, 밑그림 그리다 보니 빨랫감 생각이 나서 세탁기를 돌리고, 다시 돌아오다 밥솥 증기 구멍의 뿌연 때가 보여 돌연 밥솥을 해체해서 구석구석 청소하는 식이다.

그림 그리다 돌연 밥솥 청소


정확히는 '무언가 해야 할 것을 안 하지 않았나'라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 늘 불안하다. 회사생활 중에도 몇 가지의 일을 동시에 했었다. A 업무를 하다가 B에 대한 지시가 내려오면 머릿속의 반은 곧장 B 진행계획으로 채워진다. 어쩔 땐 A를 제쳐두고 B에 손을 댄다. 성격이 급한 탓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내면에 불안감이 항상 깔려있었던 것 같다.


남편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기 ADHD 아니야?"라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온라인 자가테스트도 해본 적이 있다. 약간 애매한 수준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가장 큰 특성은 "끊임없이 계획을 세운다"는 점. 그리고 무언가에 잠깐씩 몰입하더라도 다음 단계를 잊는 일이 거의 없다는 점을 근거로 일단 ADHD 의심은 중단하고, 휴직까지 한 마당에 살고 싶은 대로 살기로 했다. 남편한테는 산만한 게 아니라 다채로운 거라 항변했다.




여유가 생기고나니 내 공간을 '자발적으로 가꾸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되려 좋아한단 것을 깨달았다. 집이 커지고 살림이 늘었지만 청소시간이 부담스럽지 않다. 


퇴근 후 더 이상 아랫집에 미안해하며 청소기를 돌리지 않아도 된다. 대낮에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당당하게 초강력 모드 청소기를 이용해 사방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걷어낸다. 화분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떨어진 잎을 줍는다. 새싹이나 새 줄기가 나면 꼭 칭찬도 해준다.


관성처럼 도장 찍던 스타벅스와 전문점 커피는 자연스레 일상에서 빠지게 되었고 대신 원두를 갈아 종이 드리퍼에 한 잔 내려마신다. 지금쯤 회사에 있었다면 누구와 무얼 먹었으려나. 


얼추 깨끗해진 집을 보며 직접 내린 커피를 마시면 묘하게도 어른이 돼가는 것 같다. 내 공간을 정돈하고, 직접 스스로를 먹이는, 생활 속 기본이 충족되는 순간이라 그런가 보다.


1년 전 시작한 골프도 이제야 늘고 있다. 아파트 단지에 무료 연습장과 게임 시설이 있기 때문. 큰맘 먹고 바퀴 달린 클럽백도 샀다. 돈 주고 산 장비에, 공짜 연습장? 돈이 아까워서라도 열심히 연습하게 되는 효과가 있다.


땀을 흠뻑 내고 돌아와 샤워를 한다. 낮 2시 정도에 바디로션을 바르며 생각한다.

'낮에도 샤워를 할 수 있다니 진심 행복하다..'


집 앞 도서관에서 빌려온 영어회화책을 한 챕터 공부하고, 이 책 저 책 뒤적이는 시간을 가진다. 그러는 동안 보송한 옷가지와 수건의 수급을 중요시하는 남편을 위해 잊지 않고 세탁기가 돌아간다.


넷플릭스를 켠다. 나의 오랜, 찐친이자 벗인 넷플릭스는 휴직 중에도 떼놓을 수 없다. 새로 나온 시리즈나 영화가 있는지 파악하고, 무엇을 볼 것인지 고민한다. 어떤 사람들은 고민만 하다 아무것도 안 보게 된다며 별로라던데, 나는 이 뒤적거리는 시간이 그렇게 좋다. 일일이 보진 않더라도 파악해보는 시간. 자동 재생되는 예고편 덕분에 마트의 시식처럼 눈으로 분위기와 줄거리를 맛볼 수 있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한다. 서쪽지방이라 그런지 노을이 남다르다. 날씨가 좋은 날은 정말 하늘이 주황과 분홍 그 자체다.


남편이 집에 가서 루미큐브를 한 판 하려냐고 물어온다. 불과 두 달 전, 내가 사자고 엄청 졸라서 구입한 보드게임. 근데 한 열 번 하고 나니 재미없다. 꺼내기도 싫어졌다.


"자기 진짜 엄청 빨리 질려한다." 면서 깔깔대는 남편.


내가 생각해도 그렇긴 한데, 안 질리는 것도 있다. 불변의 극호, 산책하며 보는 이 노을..


넘어가는 오늘의 해는 억만금을 줘도 못 잡는다고 하지 않나. 이 빛깔, 이 온도, 이 모양의 한 번뿐인 해를 보내주며 오늘도 참 행복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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