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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Sep 29. 2022

결혼 5년 만의 집들이

양가 부모님을 한 자리에

결혼한 지 5년. 여태껏 양가 부모님을 제대로 우리 집에 모신 적이 없었다.


첫 집은 우리 둘 만으로도 복작대는 원룸 오피스텔이어서. 두 번째 집은 사람 너 덧명 정도 '수용' 가능했지만 식탁을 놓을 공간이 없어 어른들을 바닥에 모셔야 했기에.


그래서 5년 만에 지방에 내려오며 집을 구할 때, 우리는 단연 첫 번째 숙원사업으로서 양가 부모님을 초대해 하루 주무시고 가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망의 날이 밝았고, 상대적으로 가까이에 사시는 시부모님이 먼저 도착하셨다. 직접 주말농장에서 기르신 채소들과 빨래세제, 현금 봉투를 건네시며 처음으로 '손님'으로서 우리 집 소파에 앉으셨다.


'어머님, 아버님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다'며 (평소엔 잘 쓰지 않는) 찻잔 세트를 꺼내 어머님이 직접 말려서 주셨던 메리골드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이 오시면 같이 마시자셨지만 어색하신지 막상 잔을 손에 들고 계속 만지작하셨다.


이윽고 엄마, 아빠도 도착하셨다. 과일 한 상자와 두루마리 휴지, 그리고 현금봉투를 바리바리 건네시며 역시나 손님으로 첫 입장을 하셨다. 서툴지만 우린 첫 호스트가 되어 부모님들을 반겼다.


부모님들 댁에는 참 쉽고 편하게도 들락날락하고, 내어주시는 커피와 과일 그리고 몇 끼니의 식사까지 당연하게도 받아먹으면서 그 어느 하나도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직접 해보며 깨닫는다.


아닌 게 아니라 부모님들께 방 배정을 하는 문제를 두고도 나와 남편은 좀 애매한 참이었다.


집이 넓어졌다고는 하나 남편이 자취할 때 쓰던 매트리스를 둔 손님방을 한쪽 부모님들께 드리고 나면, 나머지 부모님들은 주무실 곳이 변변찮았다. 인근 호텔을 구해드릴까도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척에 자식 집을 두고 밖에서 주무시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사양하실 테지만 강제로라도 안방을 내어드리고 우리는 남편 서재 한편에 대충 담요를 덮고 자기로 정해두었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안방을 드리고, 작은 방을 내어드려야 할지가  문제였다.


늘 쿨함 그 자체이신 시부모님께서 먼저 도착하셔서는 남편에게 상황을 들으셨고, 바로 남편의 매트리스가 있는 작은 방에서 주무시겠다고 하셨다.


어느 부모님께 방을 드리든 상관없으나, 우리 부모님께 이러쿵저러쿵 상황을 설명하는 순간 '눈치의 여왕' 우리 엄마는 각종 해석을 덧붙이며 ' 무언가 매끄럽지 못했던 것인가', '딸이 시댁에 실례를 한 건 아닐까' 사서 걱정하시며 불편해할 것 같았다. 미리 정해서 알려드려야 했다. 그런 면에서 시부모님의 배려가 무척 감사하고 사려 깊었다.


엄마, 아빠도 뒤늦게 상황을 전해 들으시곤 당연히(?) 본인들이 작은 방을 쓰시겠다며 나섰다. 이때 역시 순발력 있으신 어머님이 나서셨다.


"에이 우리가 먼저 와서 찜했어요~ 다음에는 먼저 와요!"


어머님은 이렇게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예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면모가 있으시다. 남편이 닮았다.


시부모님의 배려와 재치로 방 배정을 마치곤 동네를 산책하며 구경시켜드렸다. '서울보다야 시골이지만 나름 신도심이라 있을 건 다 있다'는 나와 남편의 편파적인 가이딩을 진지하게 들어주셨다.


미리 예약해둔 맛집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했고, 늦은 밤까지 거실에서 담소를 나누며 함께 사진을 감상했다. 같이 보려고 지난 사진들을 외장하드에 담아오신 아버님의 센스도 참 남다르시다.

 

모두 함께 거실에서.


자식들 마음 편하기만을


식물 마스터 어머님은 내가 가지치기를 못하는 데다 이사를 오며 짐에 눌려 중구난방 + 삐딱하게 자라는 우리 집 고무나무를 보시곤 '참 건강하게 잘 큰다'라고 하셨다.


아버님은 안방 베란다 새시와 내부 새시가 다 이중창으로 돼있다며 겨울에도 따뜻할 거라고, '너네 집이 우리 집보다 좋다'라고 하셨다.


씻고 나오신 아빠는 쿠팡에서 대량 주문한 샴푸, 바디워시일 뿐인데 '너희 집 건 뭔가 다르고 고급지다'며 젖은 머리를 하고 흐뭇해하셨다.


엄마는 무엇보다 내가 살도 좀 오르고 무엇보다 잘 웃는다고, 표정이 좋아졌다고 하셨다. 여유가 생긴 모양이라며 내 일처럼 행복해했다.


아무리 자식네 집이라 할 지라도 조금씩 불편하실 테고 오랜만에 만난 사돈과 어색할 법 한데 이틀 내내 부모님들은 좋은 말씀을 나누어주셨다.




문득 결혼 전 상견례가 떠올랐다. 우리 양가는 상견례를 세 번 했다. 그랬더니 당시 남편 친구들이 '협상이 잘 안 됐냐'라고 묻더란다. 그 얘길 듣곤 폭소했던 기억이 난다. 실상은 그 반대였다.


처음엔 내가 사는 수도권 지역의 한 일식집에서 만남을 가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나 시부모님은 예식 자체를 제외하곤, 어떤 형식과 절차도 생략했으면 한다고 명확한 의사를 밝히셨다. 딸 가진 우리 부모님은 미리 나를 통해 시부모님의 실용주의적 철학과 사고방식에 대해 전해 들으시고도 예의상의 사양일 뿐일 거라 내심 믿지 않으셨다. 그러나 직접 만나 뵙곤 점차 확신을 가지실 수밖에 없었는데, 실용성 중시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우리 부모님이지만 최소 폐백은 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중까지도 끝내 접으셔야 했다.


결혼 날짜부터 장소, 신혼집을 구하고 자잘한 스/드/메 모두 철저히 우리 둘의 의사결정에 의해서만 진행되었고 집에 드릴 말씀이 있거나 조율할 것이 있으면 각자 전하고 그 반응과 결과를 공유했다. 


단촐한 오피스텔 신혼집, 50만 원짜리 커플반지, 플래너 없이 진행한 초저가 스드메. 나름대로 아낀 예산은 신혼여행에 몰빵 하는 동안 어른들이 '태클' 거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 흐르듯 진행되는 결혼 과정 중 이번에는 우리 집이 남편네 고향인 대전으로 향했고, 산 중턱에서 다 같이 백숙을 먹으며 2차 상견례를 했다. 이윽고 세 번째는 계약한 예식장에서 미리 시식을 하며 다 함께 식사 메뉴를 결정했다.


함께 있어도 비교적 친숙하고 푸근한 분위기였고 이에 힘 입어 결혼 한 지 한 달만에 모두 함께 속초여행을 떠났었다. 남편 박사학위 졸업식 때도 양가가 모두 한 자리에 모였었는데. 불행히도 코시국 창궐로 그 이후엔 거의 3년 간 모이질 못했다.



3년 만의 양가 재회가 이루어진 이틀간 부모님들을 보며 깨달았다. 상견례부터 지금에 이를 수 있었던 건 서로 간의 배려 덕분이란 걸.


대화 소재가 떨어져 정적이 흐르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또 다른 주제를 꺼내고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가시는 어른들. 혹여나 번거로울까봐 뭐라도 내려하면 괜찮다고, 배부르시다던 부모님들.


이번 집들이는 우리가 초대하고 대접해드리는, 우리가 '애를 쓰는' 하나의 행사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저 부모님들이 자식들 마음 편하라고, 친히 시간 내서 어색함과 불편함을 무릅쓰며 우리를 방문해주신 것이었다.


충만하게 느껴지는 감사와 따뜻함 속에서 내가 무언가를 베풀어드린다는 생각이 한참 어린 발상임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때리고 싶을 정도로 남편이 미웠던 시기에도, 그래서 정말 우리 관계를 끝맺을까 고민하며 방황할 때에도, 시부모님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심이 나를 벼랑 끝에서 버티게 해주었다. 그리고 남편이 엄마, 아빠에게 허울 없이 아들 이상의 싹싹함을 보일 때마다, 얼음 같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녹곤 했다.


부모님들께선 '결혼이란 너희 둘 잘 살면 되는, 너희 둘의 독립과정'이라셨지만,


개인과 개인의 만남은 아닌 게 확실하다. 적어도 우리 둘이 잘 살도록 존중하고 배려하고 지켜봐 주시는 양가의 만남이 필요충분조건이다.

우리의 최애 카페에서, 부모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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