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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Sep 29. 2022

막차인가 뒷북인가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청약 당첨 ②

새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소파에 앉으니 어느새 일요일 밤 12시가 다 되었고, 당장 내일부터 달라질 내 삶이 실감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 알람이 울렸다. '청약 당첨자 발표'.


"오빠~ 이리 와서 결과 같이 볼래?"


남편을 불러다 놓고 나란히 앉아 청약홈어플에 로그인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분명 뭔가 느낌이 달랐다. 긍정적으로 싸한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청약으로만 수십 번은 고배를 마셨었는데 그때마다 너무 터무니없는 경쟁률이어서 일까, 당연히 떨어졌으리라 전제하고 어플을 켰었다. 이런 오묘하고 싸한 기운은 처음이었다. 느낌이 달랐고 그 느낌은 맞아떨어졌다.

생전 처음 보는 예비당첨도 아닌 찐 당첨!




남편은 기쁘거나 행복할 때, 그리고 우리 둘만 있을 때 '기-모-찌!!!' 라 장난 삼아 길게 외치곤 하는데 그날 밤엔 나도 함께 오덕 같은 단어를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화면 이리저리 스크롤을 굴려가며 스크린샷을 찍기에 바빴고, 양가 부모님들께 인증샷과함께 카톡을 보내 놓았다.


인생의 새로운 장을 펴보려고 마음먹은 지금 찾아와 준 행운. 몇 시간 전 애틋하게 손 흔들어주시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남편과 함께 새 터전으로 내려오는 차 안에서 생각했었다.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살아보기 위해 이번 휴직과 이사를 결심했다고. 결혼 이후 서로 다른 생활패턴으로 함께 지내지 못했던 남편과 시간을 함께 하고 지난 10년간 사람과 회사 업무에 치여 잃어버렸던 여유와 스스로에 대한 애정을 회복하자는 다짐. 이름하야 "(모든 걸) 내려놓고 (지방으로) 내려오기" 모드. 진심이었단 걸 하늘이 아신 걸까.




이후 각종 서류를 제출하러 분양사무소에 가서 한 번 더 놀랐다. 우리는 생애최초 추첨에서도 떨어졌고 무작위 당첨으로 된 거라고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작위 당첨이란 기관추천, 다자녀 등 미달분이 있을 시, 해당 평형 낙첨자 모두를 놓고 뺑뺑이 추첨을 하는 것인데, 대강 계산해보니 내가 지원한 평형에 미달분이 10세대가량 있긴 했더라. 다만 신혼특공, 생애최초 특공 등 동일 평형에 지원한 낙첨자 모두를 대상으로 돌렸을 거라 생각하니 아찔했다. 우릴 도와준 그 힘을 향해 경건함에 가까운 감사한 마음이 또 들었다.



난 이번 청약 당첨이 우리 부부에게 무언가를 말해주려 한 것 같다.


혼자 알아보고 혼자 발품 팔고, 그랬기에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을 근간으로 무언가를 준비할 때는, 그게 청약이든 여행이든 혹은 동네 맛집 가는 것이든, 좋은 결과는 고사하고 둘 다 만족스럽지가 않았었다.


그런데 준비단계에서부터 함께 알아보고 상의하고 결정하고 간절히 원하니 결국 운이 따랐다. 우연한 행운이라 해도 할 말 없긴 하다. 그렇지만 내 인생에 있어 꽤 큰 에피소드에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싶고, 믿고 싶다. 함께 준비하고 간절히 바라면 결국 이루어진다고.


귀찮아서 분리세대 신청을 포기했더라면, 분양공고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청약에 지원했는지 한 번 더 체크한 남편이 없었더라면, B형이 아닌 다른 유형에 지원했더라면, 임장을 가보지 않고 확신을 가지지 않은 채로 지원했더라면.


그 어떤 한 단계라도 누락되었대도 같은 결과가 도출되었을까? 공대생 남편은 터무니없는 가정이라며, 어차피 되거나 안 되거나 둘 중 하나라며, 손사래를 칠 게 뻔하지만 나는 믿는다. 무엇하나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어차피 모든 일은 수많은 우연이 나비효과처럼 겹겹이 쌓여 완성되는 거대한 우연이지만, 마지막 화룡점정을 찍는 것은 '그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라고. 나는 그걸 지푸라기라도 잡는 간절함이라고 부르고 싶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써놓곤, 1년 새에 부동산 시장이 하락세에 접어든 것 같다. 분양가상한제 막차를 탄 것일까, 혹은 부동산 파티는 끝났으니 뒷북 당첨이 된 걸까. 2년 뒤 본계약을 앞두고 남편과 나는 또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확정 분양가가 주변 시세보다 높을 시엔 아마도 계약을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다행히 당첨자 지위를 포기하면 청약통장이 부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고맙게 찾아와 준 집을 포기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일단 저축 열심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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