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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Sep 27. 2022

모르는 사람 결혼식에 축하공연을 하라니.

이건 꿈이야

에 전입 온 지 며칠이나 되었을까. P팀장이 나를 불렀다. 나와 함께 전입 온 여직원 H의 결혼식이 한 달 정도 남았는데 온 부서원이 축하공연을 할 수 있게 준비하면 어떻겠냐고 물어보셨다.


정확히는, 물어본 것이라기보단 지시였다. 이미 계획을 짜와서 나에게 준비 방향을 정해주었기 때문이다.


'노래는 이걸로 했으면 좋겠고, 안무는 유튜브에서 골라봤는데 어때? 위키씨가 바꿔서 직원들좀 가르치면 될 거 같고....'


나는 친한 친구들과도 노래방을 가지 않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결혼식을 위해 전 부서원을 한 달동안 연습시켜서 춤을 추라고?


장은 한 술 더 떠서 배경 노래는 우리가 직접 부른 MR을 틀라하셨다.


눈 앞이 아찔했지만 전입 온 지 3일차 막내직원 주제에 토를 달 수는 없었다.


나는 현실과의 타협이 빠른 편이다. 곧장 자리로 돌아와 직원들에게 전체공지 쪽지를 돌렸고, 안무 연습차 모일 시간을 정했다. 함께 노래 부를 녹음실을 예약했고 유튜브 안무를 익혔다. 비용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도 고민했다. 본업은 본업대로 익혀야해서 정신이 없었지만 장님의 직접지시인만큼 신경 써야했다.



대체 누굴 위해 이렇게 난리부르스를 추는걸까. 예식의 주인공이자 나보다 7살 위 H선배는 우리 회사에서 가장 힘이 센 부서 출신이었는데, 이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났다. 예비남편 또한 대기업 소속인데 굳이 우리 회사의 예식장에서 식을 올리고, 우리회사 임원에게 주례를 맡기고, 장의 축하공연 제의를 기쁘게 그리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부서 회식때 돌연 예비남편을 데려와서 인사시켰고(여기까지는 ㅇㅋ), 신난 팀장은 갑자기 식당 앞 공원 한복판에서 휴대폰으로 노래를 틀더니 우리모두에게 연습한 안무를 추게 했다. 유튜브가 그 때 유행했더라면, 우린 유튜브에 떴을거다...



한 달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온 직원이 녹음실에 몰려가선 헤드셋을 끼고 떠나가라 노래했다. 그렇게 탄생한 MR을 틀어놓고 수 없이 동작을 연습했다. 소품도 착용해야하지 않겠냐는 한마디에 급히 파티용품점으로 달려가 나비넥타이와 머리띠를 샀고 현수막도 배송 받았다. 얼추 모든 준비가 끝났다.


대망의 예식 당일,  단톡방은 아침 일찍 부터 요란하게 울려댔다. 회사 로비에서 리허설을 해보자며 무려 예식 두 시간 전 모이기로 했고 아직 약속시간 전인데 장 및 간부들이 벌써 도착했다한다.


'저는 도착했습니다.'

'거의 다 왔습니다'

'ooo터널 지났는데 정체가 심합니다.'


숨이 막혀 카톡을 끄곤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예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되었다. 흘러나오는 낯익은 노래를 들으며 익숙한 동작들을 두둠칫 수행했다. 큰 실수 없이 공연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장님이 마이크를 잡더니 예고에 없던 멘트를 날리기 시작한다.


"H대리 결혼 축하하고 ~ 블라블라 ~ 우리 OO팀 기억해주시고 올해 승진예정자 T차장 잘 좀 부탁드립니다! T차장 이리 나와서 인사해"


뜨악 했다. 남의 결혼식에서  어필과 승진예정자 홍보활동 이라니. (우리 회사는 승진연도, 나이 등의 순서로 승진에 도전하는데, 같은 승진연도를 가진 경쟁자가 있을 경우 어떤 식으로든 결정권자에게 '어필' 해야한다. 개인 업무평가결과도 반영되긴하지만 차순위.)


모든 것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힘센 부서 출신의 H는 임원에게 주례를 맡겼고, 그 부서의 사람들을 대거 초대했다. 하위 직제 우리 의 똑똑하고 치밀한 P팀장팀과 승진예정자 홍보를 동시에 행할 수 있는 커다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내빈석을 보니 우리본부 최상위자 내외분이 흐뭇하게 박수를 치고 계신다. 장님은 분들 오실 것도 염두에 두었거나, 혹은 같이 가시자며 모셔왔을 게 분명하다.


이후 다같이 모여 식사 하자셨지만, 더 있을 수가 없었다. 바로 뛰쳐나와 남자친구(현 남편)를 만나 술을 실컷 마셨다. 주말내내 공연 영상과 사진들이 단체카톡방에 올라왔고 사골국처럼 우려졌다.


불행히도 사골국의 수명은 지나치게 길었다.



H직원이 신행을 마치고 복귀한 기념으로 우리 본부 최상위자와 함께하는 회식자리가 생겼다. 팀장은 또 가만 계시지 않았다. 공연 재탕에 발동을 걸기 시작한거다. 눈치 빠른 간부들은 끌고 온 자동차 문들을 열고 스피커로 공포의 축가노래를 큼지막하게 틀어버렸다.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에 반응했다면, 불쌍한 우리 부서원들은 축가노래에 무조건 반사적으로 춤을 추는 아랫것들이었다. 외딴 산 속 백숙집에서 진행된 회식이었기에 망정이지, 고성방가로 잡혀가도 할 말 없을 아수라장이었다.


최상위자께선 취한 채 춤 추는 우리를 촬영하여 '2차 창작물'을 얻으셨고, 이후 가는 회식자리마다 공유하고 보여주셨다. 타부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압박에 의해 어거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유난맞고, 아양떠는 기쁨조 부서'우리를 낙인 찍었고,  "너가 준비했다며?" 라는 뾰족한 말까지 덤으로 듣곤했다.



H직원과는 끝끝내 가까워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부서원들이 본인을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임에도 최선 다해 준비한 공연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한 태도가 거슬렸다. 말로는 감사하다했지만, 늘 그녀의 대화주제는 상사와 이전 부서 인연들에게 쏠려있었고 은연중 현 부서를 무시했다. '그 부서에 비하면 여긴 일하는 것도 아니다' 는게 그녀의 단골 주장이었는데, 그렇게 높은 업무강도에 시달리다 온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과하게 태만하고 여유로웠다. 묘하게도 그녀의 상사는 그녀를 어려워했고, 미처 지시하지 못한 업무의 불똥을 파트 만만한 막내인 나한테 자꾸 튀겼다. 그녀가 '자연주의'로 아이를 자마자 부서 채팅방에 출산순간의 적나라하고 감동적인(?) 사진을 올렸을 때 마침내 깨달았다. 이 선배와 죽어도 맞을 리가 없구나. 조직에 대한 소속감과 애착이 이토록 강해서야.



그로부터 2년 후 내 결혼식. 축가 노이로제에 걸린 부서원들은 설마 이번에도 2년전의 악몽이 되살아날까 벌벌 떨었다. P팀장 멀리 전출가버리고 없는데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불쌍한 동료들.


일찌감치 "축하공연은 1도 신경쓰지 마시라. 와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고 말씀드렸다.


8년 전 그 날, 잘 모르는 사람의 결혼식에 돈을 내고, 노래하고, 춤 추고, 마지막엔 도망치듯 나와야했다. 업무의 연장 그 자체였기에.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 부서원들이 내 결혼식에 와준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무거운 배를 안고 떠났으면 좋겠다. 날씨 좋은 봄 날, 갈 수 있는 다른 곳들 제쳐두고 잠시나마 들러준다면, 이미 너무나 감사하다.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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