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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Oct 04. 2022

남편 두고 혼자 가는 버릇 어디서 배웠노

가도 될까, 스페인?

이탈리아 여행이 취소되며 한동안 마음 한 곳이 뻥 뚫린 것 같았다. 티비에서 우연히 돌로미티가 나올 때면 나와 인연이 닿지 않은 곳이라는 생각에 서운해져선 채널을 돌려버리곤 했다.


맛있는 걸 먹으면서도, 재미있는 유튜브를 보면서도, 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어느새 내 레이더는 새로운 곳을 향해 윙윙 돌았다.


코로나에서 쾌차하자마자 본격 고민한 끝에 걸려든 곳은 '스페인'. 대학교 시절 120여 년째 짓고 있다고 배운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15년 동안 얼마나 더 높아졌을지, 내 눈으로 보고 싶다.




남편에게도 의중을 물었더니 역시 불가하다고 한다. 같이 갈 수만 있다면 가까운 곳으로 행선지를 바꾸고 기간을 2~3일로 대폭 줄이겠다 했지만, 역시나 안 된단다. 정 가고 싶다면 혼자 가라고도 덧붙였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이태리 여행만으로도 남편은 직장에서 가시방석이었을 테지.


서운하지만, 하고 싶은 것을 꼭 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면 그나마 덜 서운하다. 혼자 가라고 쿨하게 말해준 것이 어디냐. 더 이상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 결심했다. 혼자 가기로.



결심한 거 맞아?


비행기표 발권 직전 단계에서 '뒤로 가기' 누르기를 수십 번. 매일 달라지는 티켓 가격을 외울 지경에 이르렀다. 혼자 가겠다고 떵떵거려놓곤 막상 홀로 떠나자니 왜 마음이 불편한 것인가. 저번 이탈리아 여행에선 이 단계를 넘지(?) 못해, 남편에게 같이 가자고 했었다.


몇 년 전 홀로 떠났던 LA 여행 때는 학교 선배가 그곳에 살고 있었지만, 이번엔 아예 혼자라는 생각에 겁도 나고, 한편으론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러길래 같이 갈 수 있게 협조를 좀 해보지 그랬나 원망 어린 생각도 들고,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가고 싶긴 한 건가 스스로에게 되묻기도 했다. (정말 가고 싶다!)




결정장애에 시달리던 어느 날, '남편 두고 유럽여행'을 검색해볼 요량으로 포털에 접속했다. 나 말고도 혼자 간 유부녀가 계시다면(물론 계시겠지만), 그 사실만으로도 힘이 날 것 같았다. 검색어를 치던 중 아래에 자동으로 뜨는 연관검색어를 보곤 그야말로 빵- 웃음이 터졌는데 아주 압권이었다.


AI 연관검색어


남편 두고 혼자 먼저 가는 버릇 어디서 배웠냐고?


뭐지? 나한테 하는 말인가? 부모님들 속마음인가. 간담이 서늘했다.(알고 보니 박정희대통령이 육영수 여사를 향해 쓴 사부곡이었다.)


버릇처럼 어플을 켜 매일 검색하던 일정으로 티켓팅 시뮬레이션을 하려는 찰나, 또 철렁하고 말았다.


잔여좌석 : 0  가까운 날짜로 다시 검색하시겠습니까?


헐, 이제 정말 마음을 정해야 한다. 본래 원했던 날짜는 이미 물 건너갔다. 다급해진 나는 남편에게 최후의 통보를 했다. 나는 갈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만 고민해라 좀!




마. 침. 내. 마일리지를 털어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고 좌석지정 및 오토 체크인까지 완료했다.


티켓 결제만 했을 뿐인데,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들이 훨씬 많은데. 신기하게도 머릿속과 마음을 짓누르던 온갖 돌덩이들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여태껏 한 모든 고민들이 별 것 아닌 듯 갑자기 휘날리고 증발한다.


출발 전에만 느낄 수 있는 설렘, 준비과정에서의 두려움과 고민이 진심으로 반갑고 행복하다. 떠나기로 결심하길 잘 했다.


칼을 뽑았으니 스페인이라는 무를 잘 해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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