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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Sep 30. 2022

휴직 중엔 자꾸 전화하지 마세요..

차마 전하지 못한 말

휴직 후 한 달쯤 되었을까. 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쉬고 있는데 식탁 위 휴대폰 진동이 드르르르 울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A선배 사선번호였다.


"여보세요?"


"어 대장~~ 나야"


나를 항상 대장님이라 부르시던 업무 파트너 띠동갑 선배님이었다. 휴직 후 몇 차례 보내신 카톡에 심드렁한 답장을 하자 직접 전화하신 모양이었다.




원래 둘이서 나눠하도록 배정된 내 업무는 갑작스러운 옆 직원의 휴직으로 한동안 혼자 해내야 했는데, A선배는 그 자리를 채울 겸 들어오셨었다.


한참 위 선배라 선뜻 업무 나눠드리기가 어려울 거라 예상은 했는데, 오시자마자 여기저기 보관한 약 위치를 알려주시며 나에게 간곡한 부탁을 하시는 게 아닌가.


"내가 가끔 너무 힘들어하면, 두 번째 서랍에 이게 있고... 진짜 완전 위급한 상황이면 세 번째 서랍에 이걸 먹이면 되고.."


10년째 공황장애를 앓고 계신다셨고 갑자기 본인이 힘들어하면 호흡곤란이 일어날 수 있으니 약을 먹여달라고 하셨다. 언제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 거냐 여쭸더니, 예측할 수는 없단다.


공황장애의 ㄱ도 알지 못하는데, 난데없이 바로 옆 환자 등장에 덜컥 겁이 났고, 혹시나 스트레스 받으실까 원래 나눠드려야 할 업무를 인계해드리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아주 기본적인 시스템 구동법과 월간 스케줄 설명을 해드리고 비교적 단순한 루틴들만 지켜주십사 부탁드렸다.


부탁드린 업무는 수행하셨고 책임지셨다. 그러나 정해진 일정에 따라 전산처리하는 일 보다 중요한 핵심은 사실 내부 민원이다. 사측, 노측, 직원 당사자들의 목소리 모두를 들어드려야 했고 새로운 현안이 터질 때마다 끊을 건 끊고, 들어드릴 건 들어드리면서도 상위 부서들과도 조율해야 했다. 감사가 터지면 전전전임자부터 나에 이르기까지 문제 될 건 없는지 날이 한껏 서있었다. 내 딴에는 민감한 조율 사안을 홀로 떠안으면서, 이외 루틴 업무들도 당연히 처리했고, A선배가 맡은 부분을 잊지 않고 잘하시는지 총괄(?) 하느라 혼자일 때 보다 더 바빠진 듯했다.


나름의 배려를 해드린 건데 해맑은 A선배는 절친한 노조위원장과 또래 직원들에게 때때로 "이 자리 일 없다. 심심하다."며 우는 표정을 지었고,  나에겐 매번 "나 심심해~ 일 좀 줘" 라며 툴툴대기도 하셨다. 정말 진심인 걸까 의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A선배가 쓰던 컴퓨터는 내가 쓰던 컴퓨터라서, 전임자와 내가 만든 업무 매뉴얼과 모든 자료들이 업무별, 연도별 폴더로 다 정리되어있던 터인데, 절대 스스로 열어보시진 않았다. A선배 자리에 가서 하나하나 클릭해가며 알려드려야만 습득하셨다. 나이 탓에 한 번 들으면 기억이 안 난다며, 같은 것을 몇 번이나 물어보시거나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은 부지기수.


선배가 돼서 후배 눈치를 보며 물어보고, 매번 전화하는 것도 고역이겠다 싶어, 마음을 다잡고 알려드리곤 했다. 남자지만 웬만한 여자들보다 훨씬 여성스러운 성격이셔서 상처받으실까 말도 항상 조심했다. 공황장애를 앓게 되시기까지 힘들었던 어린 시절과 현재 다소 불만이신 가정생활에 대한 고민도 들어드리고, 최선을 다해 위로해드리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업무의 분장은커녕 더 의지하시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틈 나는 대로 공인중개사 자격증 공부를 하셨고 내년까지 꼭 붙어야 한댔다.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할까. 혹은 사무적으로 다가가 '저번에 알려드린다고 했던 업무 알려드릴게요' 라고 운을 뗄까?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내년 공인중개사 합격일까지만, 혼자서도 하던 일이니, 어떻게든 끌고 가보자 스스로를 다독였다. A선배도 다 하실 줄 알고, 심지어 잘하시는 분인데 지금은 단지 적응기인 걸 거다..




그렇게 1년 반이 흘렀고, 그는 한 방에 시험에 합격했다. 배려해준 것 다 안다며 고맙다고 평소보다 더 자주 비싼 밥도 사주셨지만, 나에겐 자리에서 도시락을 뜯어먹더라도 함께 일 할 파트너가 필요했다. 어린 시절의 아픔이나 가족 간의 불화를 털어놓고 위안을 바라기보단, 당장 닥친 과제에 대해 어떻게 할 건지 물어오는 적극적인 동료가 필요했다. 나를 보스라 부르는 선배 말고, '야야' 하더라도 함께 해결해가는 맛을 볼 파트너가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 회사에서 뼈가 굵은 A선배는, 회사가 본인 없이도 어떻게든 돌아간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듯했다. 시험 이후 업무 나눠달라며 몇 번 말은 하셨지만, 항상 흐지부지 되었고 나는 점점 포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분께 전화가 오면 부담스럽다. 회사에서건 밖에서건. 문제가 있거나 기억이 안 날 때 나를 찾곤 하셨기 때문에. 또 아무렇지 않은 척 자판기처럼 답을 줄줄 뱉어내야만 할 거니까. 그리고 성질머리 급한 한 마리의 도비로서 "아 그냥 그분한테 제가 전화한다 하세요!" 라 끝맺겠지.


A선배는 날더러 열심히 하는 후배라고 어디 가서도 항상 좋게 말씀해주시고, 잘해주시려 항상 애쓰셨다. 누구랑과도 평화롭고 사이좋게 지내고자 하셨고 눈치도 많이 보셨다.


어차피 혼자 할 수 있으면서 손해보고 있는 듯 A선배를 미워하는 것이 내심 미안하기도 하고, 스스로 옹졸한 것 같기도 했지만, 회사에 왔으면 제일 우선은 일, 일부터 하는 게 맞다는 젊은 꼰대가 내 안에서 우세했다.




휴직과 동시에 가면을 벗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이 버거웠기 때문이다. 2년을 함께하고도 추가로 인계인수만 몇 개월에 걸쳐 해드리고 나왔건만. 무슨 일이실까.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몇 번이나 강조드렸던 업무 관련으로 해결이 잘 안 되신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그 업무 관련 나와 매번 충돌하던 이 과장님이 계셨는데, 이 과장님한테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한 없이 바라시기에 다소 업무적으로만, 그리고 단호하게 말씀드려야 한다.


"이 과장님 또 생떼 쓰시네요. 우리 권한으로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안 된다고 하셔야죠."


" 근데 XX형이 여태껏 왜 안 해준 거냐고 담당자가 업무 태만이었던 거 아니냐고..."


"업무태만이요? 저 갔다고 또 뒷말하시는 건가. 다른 본부에 다 물어보라 하세요. 말이 되는 소린가!"


내 목소리가 올라가자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A선배는


"아 그래그래 그렇지.. 나야 알지... 그냥 대장은 신경 쓰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XX형(=이과장)한테 잘 말해 볼게~"


... 진작 그렇게 하시지 왜 나한테 전활 하신 걸까. 내가 이 과장님과 싸울 때마다 얼마나 열받아했었는지 알면서. 형, 동생 하는 사이인 본인이 더 매끄럽게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이제 담당은 본인이니 알아서 하시는 건 당연한 거고..


업무는 핑계고 잘 지내냐며 안부를 물어주신 거란 것을 알면서도 통화 내내 무언가 불편했다.


불편함은 다음 대사에서 폭발했는데, 갑자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역으로 놀러 오신다면서 직접 날짜까지 선제시하시는 게 아닌가.


"그 연휴 끼워서 ㅇㅇ랑 ㅁㅁ도 데리고 갈까 하는데~~"


하, 더 이상 끌려다닐 순 없다고 생각했다.


"아, 네 근데 그때 제가 스케줄이 생길 수도 있겠어요~"


다소 딱딱한 나의 대답을 귀신같이 알아채신 예민한 A선배는 서운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에 봐서 정하자며 황급히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 한 편이 불편했다. 본심을 애써 눌러가며 지켜온 2년의 인연이 한 발짝 멀어져간 듯 했다. 그렇지만 묘한 홀가분함도 들었다. 잠깐의 거절을 못해서 또 방문일을 정하고야 말았다면, 앞으로 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뒷 말은 차마 못 했지만. 그래도 잘했다.


보고 싶은 사람들,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들부터 초대하고 어울리기에도 1년은 짧다.



선배님 죄송해요. 이제는 혼자 해결해주시면 좋겠어요. 전화 그만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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