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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Mar 02. 2023

이것은 카풀인가 고문인가

천정부지로 솟은 기름값 탓에 직장인들간 카풀이 유행이라는 뉴스를 보니 세상 불편했던 '그'와의 동승이 떠오른다.




옆 파트 40대 초 H차장은 감정 기복이 컸고 속이 다 보였다. 강약약강의 대표주자로서 윗 분들에겐 군기 가득 맹목적 충성을, 아랫 직원들에겐 훈수 가득 '내가 곧 진리' 포지션을 잡곤 했는데 오글거림은 보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문제는 본인 직속 여직원이 호락호락하지 않자 지시하지 못한 업무의 불똥을 당시 옆 파트 막내이던 나에게 튀겼다는 것.



"ㅇㅇ씨.. 우리 회사에서 서울역 가는 방법 원페이지로."


"??"



1호선 타거나 버스 한 방에 도착할 서울역을, 네비나 어플 두고 대체 왜 굳이 종이에, 번거롭게 설명하려는 걸까. 손님은 그 종이를 들여다보며 도착 후 기차 탑승 전 쓰레기통에 버리려나. 도무지 이해할 구석이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차장님, 맵 어플 보시면 현시점 제일 효율적인 동선부터 알려주거든요. 언제 출발하는지에 따라 다 달라질 수 있어요."


"음.. 근데 그냥 약도 넣어서 간단하게 한 장만 만들어줘."


간단한 일을 어렵게 만드는 건 당신이라 말해주고 싶었다. 손님을 깍듯이 의전하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그럼 알아서 할 것이지 왜 나냔 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떨어지는 잡다구레한 지시들을 이해하려 해도, 무엇보다 난 그의 부하직원이 아니라는 점. 정작 그의 부하직원은 정시 출퇴근하며 지시받는 내 모습을 유유히 지켜보곤 했다. 꼬리를 무는 피해의식 속 부아가 치밀었지만 시키는 대로 빨리 해주는 게 경험상 낫다. 


직속상사도 아니면서 그는 2년 간 꾸준히 나를 자판기마냥 찾아댔다. 


"그 식당 점심메뉴도 있어?"(인터넷 검색 좀)

"이거 정산해 줘."(베스킨 파인트까지 법인카드로 사다니)

"저 분들 좀 역까지 태워다 드려." (내 손님 아닌데..)

"xx회의 때 필요할 일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찍 와서 대기해줘."(내 본업은?)

"ㅇㅇ보고자료 언제까지 다듬어줄 수 있어?"(맡겨놨나)



당시 내 직속상사는 승진심사를 앞두고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는 모양새였고, 인사평가 관련 옆 파트장과의 친분도 사수해야 했기에 나 따위가 얼마나 착취되든 무관심했다. 안 그래도 본업 외 애매한 분장은 다 끌어안고 야근을 하던 시기에 파트장까지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니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시간이 가까워져 H차장이 갑자기 차를 태워주겠단다.


"ㅇㅇ씨 A근처에 살지 않아? 나는 E역이니 가는 방향인데."


버스에 멍하니 앉아 이어폰을 꽂은 후 회사를 잊는 소중한 귀가루틴에 끼시겠다니. 머릿속을 스쳐가는 핑곗거리들 중 도대체가 쓸만한 게 없어 어렵게 하나 골랐다.



"아.. 본사 xxxx실에 내일까지 보내야 되는 게 있어서요. 더 하다 가려고요." 


"아 그거? xxxx실? 누군데? 내가 전화해 줄게."


"......."



그는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기 시작했고, 본인이 몇 년 몸 담았던 부서라며 의기양양하게 전화를 걸어 데드라인을 반나절 늦춰주었다. 정말이지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됐건 그는 호의를 베풀었고 나는 응당 감사해야 할 아랫것이었다.


"아 네 감사해요. 그럼 가시죠 지금."




구형 ef 소나타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는 굉장한 거북이 운전자여서 절대 시속 60킬로를 넘기지 않았고 뒷 차들은 화난 드라이빙으로 그를 제쳐가기 일쑤였다. 우리 회사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지름길 따위 그만 몰랐으며 신호란 신호는 모두 걸리는 신기한 저속주행을 했다. 그뿐이었으랴, 가는 내내 한시도 쉬지 않고 조언을 늘어놓았는데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우리 회사에서는 업태가 중요해.."

"업태요?"

"응. 내가 ㅇㅇ씨랑 일 하고 어디 가서 ㅇㅇ씨에 대해 어떻게 말하겠어?" 

"아 평판 같은 거네요."

"우리 회사는 업태가 전부라. 우리 건물에만 해도 솔직히 업태 안 좋은 사람들 다 구분되잖아. 그리고 참 이렇게 방향 같을 땐 서로 카풀 해주면 좋지 않아? 나중엔 ㅇㅇ씨가 나도 태워주고. 블라블라블라"


고속도로에 들어설 때쯤 나는 스스로 되뇌었다.


'좀만 참자. 고속도로 15분 타면 끝이다.'


그러나 통행료는 왜 냈나 싶을 정도로 속도에 변함이 없었고 너무 느려서 누군가 뒤를 처박을 수 있겠다는 불안감에 틈날 때마다 조수석 쪽 백미러를 흘끔 대야 했다.




인고의 시간 끝에 마침내 고속도로 IC를 빠져나와 우리집 근처 A역이 가까워졌다. 대중교통으로 왔다면 진작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 1시간 넘게 말을 쉬지 않는 그의 영향으로 정신이 혼미했으나 곧 내려주겠거니 남은 힘을 쥐어짜 웃어 보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A역 방향으로 꺾어야 할 구간에서 꺾지 않고, 본인 집이 위치한 E역 방향으로 계속 내달리는 것이 아닌가. B역, C역, D역..을 차례로 지나칠 때마다 지금이라도 세워달라 할까 고민됐지만, E역에 내려줄 심산인 것 같아 조금만 더 참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로 했다.



문제는 그가 그 예상마저 뛰어넘었다. 차창 밖으로 E역 출입구를 유유히 지나칠 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굼벵이 소나타는 마침내 H차장이 사는 아파트 단지로 진입했고 한눈에 봐도 주차난이 심해 차를 댈 마땅한 공간을 찾아 여러 바퀴 돌아야 했다. 



어렵사리 주차 후 마침내 차에서 내리던 순간, 이 묘하게 더러운 기분을 뭐라 묘사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되었다. 태워다 주었는데 하나도 고맙지 않다. 분명 퇴근했는데 퇴근한 것 같지 않다. 업무스타일, 사고방식, 행동거지 그 어느 것 하나 나와 맞지 않다 느꼈는데 카풀에 대한 개념마저 달랐을 줄이야.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제 집 앞마당에 내려줄 줄이야. 제일 불쾌한 건 그 자신은 스스로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점이었다. '친절을 베풀었고, 앞으로도 얘한테 많은 일을 좀 더 맡길 수 있겠다'라고 확신한 듯한, 우리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믿는 눈치였다. 


그날 집에 오는 데는 평소와 똑같은 비용을 들여 두 배 넘는 시간이 소요됐으며 관심 없는 이야기를 1시간 반동안 경청하는 초과근무가 덤이었다. 거절할 수 있었고 거절했어야 하는 호의였다.



힘 없이 갈아탄 지하철 안에서 되새겼다. 거절도 의사이고 표현이기에 거절하지 못 하는 건 일종의 무능이라고. 그 무능으로 내가 오늘처럼 고달파질 수 있다. 필요할 때 단호히 "No"라고 말 할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철벽 갑옷을 입히기로 했다. 




얼마 뒤, 출근길에 태우러 갈까 묻는 H차장의 기습 공격이 날아들었다. 스스로 신기할 정도로 반사적인, "언제 출근 할 지 몰라서요." 라는, 엉성하게 급조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어쨌건 쳐냈다. 


터무니 없는 지시에는 '넵' 이 튀어나가기 보다 그를 몇 초간 빤히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지시할 게 맞는 지, 맞다면 한 번쯤 그 내용을 되돌아보라는 눈빛으로.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그가 꼭 한 마디 보태기 시작했다. "아 아니다, 이따 다시 얘기할게."




여느 인연들 처럼 H차장도 교훈을 남겼다. 불편한 기분과 상황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를 표현조차 않고 알아주기만 바란다면, 그야말로 과한 기대이고 헛된 수고라는 걸. 누군가와 맺는 관계 또한 함께 차를 타는 카풀로 본다면, 틀린 방향으로 달리는 것 보다야 누구라도 필요할 때 브레이크를 밟는 게, 잠시 서는 게, 모두가 다치지 않고 오래 '갈 수' 있는 길이란 것도. 


(차에 함께 타기 싫은 사람과는 애초에 안 타는 게 상책이겠지만 사회생활은 피할 수 없는 강제 카풀의 연속인 듯 하다..^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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