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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Jan 05. 2023

나 빼고 골프에 미친 가족과 치앙마이

남편과 부모님. 다른 장소, 같은 행동


1년 반 전, 부모님이 안 쓰시는 채를 물려주신 것을 계기로 남편과 골프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주말에만 재회하는 주말부부인데 골프만이 일상의 전부였고, 남편은 흡사 골프 치러 집에 올라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한여름에도 저렴한 야외 연습장을 찾아 미친 듯이 공을 쳐댔고 상처 투성이 손과 사지는 파스 냄새로 가득했다.



"아 제발 좀 그만. 다른 얘기 하자!"


우리가 골프를 배우기 시작한 이후부터 친정에서의 대화와 활동의 90%는 골프가 되었다.


"OO이, OO이 너네 드라이버 비거리 얼마나 늘었어?"

"내일 아침에 스크린 예약해 둘까?"

"장모님, 장인어른 제가 쳐보니까요..."


모든 대화의 귀결은 골프였고, 온 가족이 스크린 골프를 치러 가면 내친김에 한 판 더 하자며 18홀x2판=36홀씩 치느라 하루가 우습게 지나가버리곤 했다. 내가 출근한 사이 남편은 엄마와 둘이서 게임을 하러 가기도 했다. 승부욕이 없는 편이 아니기에 이에 질세라 손이 부르트도록 연습했지만 어느 순간 이들의 열정에 질려버리기 시작했다.


취미 활동을 함께 해보시려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드리는 게 도리이지만, 무언가에 꽂히면 말 그대로 과해지는 남편에게 자꾸 기름을 부으실 때면 야속했다. 스크린 게임을 예약해 두시거나, 관련 장비를 주실 때마다 남편은 더 빠져들었다. 제발 다른 얘기 좀 하자며  찬물을 끼얹어보아도  뜨거운 열정 앞에서는  위협거리도 되지 못하고 증발했다.

새로 나온 영화나 책, 드라마 얘기도 하고 일주일간 있었던 크고 작은 일 공유겸 유유자적 산책도 하고 싶은데 골프 외 그 어떤 활동에도 흥미가 없는 남편 탓에, 어느 순간 그의 에너지와 관심을 골프에게 다 빼앗긴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골프 안 치는 사람들에게 '너무 재밌으니 얼른 배우라'는 조언을 늘어놓는 모습도 주제넘거나 좋게 보이지 않았다. 각자 어련히 알아서들 할까..



이러한 과한 열정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1년이 지나도록 클럽백을 사지 않았고, 전용 신발도 마련하지 않았다. 캐디가 없는 그나마 저렴한 골프장에서 딱 한 번 라운딩 해보았는데 가격대비 느끼는 행복이 크지 않아 앞으로도 굳이 나올 필요가 없겠다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에게 골프란 남편에게 지기 싫어 실내 연습장에서 꾸역꾸역 연습하는 하나의 신체활동일 뿐이었다.


조금씩 나아지는 자세와 정타율이 성취감을 주긴 했다. 힘이 세서 비거리도 긴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나까지 골프를 좋아하면 지는 것만 같았다.


죄 없는 골프는 어리둥절할 일이지만, 여하튼간 일방적 애증관계로 얽혀있던 '그 존재'와 마침내 담판을 지어야 할 순간이 왔다.


부모님이 치앙마이 골프여행을 제안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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