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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을 파는 잡화상 Aug 02. 2023

석상들

오래된 서랍 POETIC


      

사신들은 아주 오래전에 돌아왔어야 했다

아니면 난파당한 배에서 목숨을 바다에 돌려줬어야 했다

보물선이란 안타까운 미련만 털어먹었더라도

가문의 명예와 충성심만 배설해 버렸더라도 

끈질기게 조난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목을 내놓고 출항했을 것이다

어느 군주의 어명을 위해 배 멀미도 준엄하게 꾸짖으며 돛을 펼치고 

바람을 명하였을 것이다 

국난을 앞에 두고 혹은 조공을 받기 위해 의관을 갖추고

국왕의 친서를 품고 병사와 하인들을 거느리고 눈물 뿌리는 어미와 아비를 

외면하고 군주의 어명을 받들러 


구명조끼 하나 없이 그들은 살아 있었다 

긴 세월 유랑했다는 것은 그들의 행색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들의 옷은 돌이 되었고 

그들의 명예와 충성심마저도 돌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 돌이 아닌 것이 없었다

돌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그들이 걸어온 길은 바닷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육로를 거쳐서 하늘 길까지 밟으며

사막에서 모래알을 씹어 먹고 대초원에서 풀물을 들이키며

나라를 잃은 유랑민들의 비애를 차곡차곡 기록하며

지금 그 자리에 도착했을 것이다         


몸이 그들의 고단한 길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신들의 몸은 조금씩 허물어져 있었다

문둥병을 앓는 자들의 징후가 그들에게 나타났다

꽃은 피지 않았고 몸은 낡은 열매로 떨어지다 

돌이 되었을 것이다

     

가장 직급이 낮은 듯 맨 뒤에 서있는 사신은 코 위로 

자신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 앞에 선 세 번째 사신은 이마 위 머리가 지워졌다

저장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평안하지 

두 사신은 동요하지 않았다     


두 번째 사신은 발목이 잘리고 코가 떨어져 나갔으나 

웃고 있었다

그의 두개골은 온전했던 것이다

두개골이 주는 즐거운 유희를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가장 위엄 있는 첫 번째 사신은 의관을 갖추고 양손으로 

간책(簡冊)을 그러모아 가슴에 대고 있었다

그는 막 궁궐 문을 통과해 군주가 있는 어전으로 들어갈 듯했으나

그의 입은 뭉그러져 자신의 군주를 부를 수가 없었다

         

사신들은 그들이 잊힌 것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어명을 받들어야 한다는 명제만이 그들을 움직였을 것이다 


궁전은 불태워지고 군주는 벌거벗은 몸으로 목숨을 구걸했다 

충신들의 아내와 딸들은 적의 노리개로 바쳐졌다 

늙은 어미와 아비는 수치와 모욕 가운데 자결 당하고

그들의 젊은 당나귀 같은 아들들은 거세당한 채 튼튼한 노예로

이 나라를 떠난 지 오래였다     


그들이 돌이 되어 버린 것이 다행이었을 것이다

시간을 재구성할 기억이 돌의 유전자로 변한 

영원한 순간


군주의 어명을 받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돌에 갇히고서야


사신들은 

조경회사 정원의 잘 관리된 파란 잔디 위에서 

천진한 걸음걸이로 

오래된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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