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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을 파는 잡화상 Aug 06. 2023

소년의 침몰

이청준,「침몰선」

아름다운 배를 한 척 품은 소년이 있었다.  


어느 가을날 소년은 시작부터 실체와는 상관없이 아름다운 환상을 가슴에 품게 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을 침몰선은 ‘뜰 앞 감나무 가지에 올라앉아 한나절 바다를 바라보던 소년의 사념 속으로 문득’ 들어온다. 그날 ‘침몰선은 차오르던 밀물을 타고 금방이라도 닻을 올리고 떠나갈 듯이 출렁거리며 떠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물섬에 대한 환상을 키우듯 소년의 단조로운 섬 생활에 상상력을 입은 침몰선 이야기가 그렇게 다가온다. 마을 사람들 역시 배를 보면서 상상력을 부풀린다.


그러나 그 배는 이미 좌초된 침몰선이었다. 그것도 꽤 오래전에 침몰된 배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소년은 자신이 품은 배가 ‘실상은 영영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된 침몰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 문장은 소년이 품은 환상의 끝을 암시하고 있다.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 따라 침몰선의 이미지는 다양하게 변주된다. 침몰선의 실체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흐르고, 공부를 위해 타지에 나가서도 배를 생각했던 소년은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 간다. 마을을 떠났던 그가 군복무 중 휴가를 나오지만, 침몰선에 대해 품었던 환상과 기대를 지워버린 사람들처럼 그 역시 더 이상 침몰선에 주목하지 않는다.

           

성장은 환멸 속에서나 이루어지는 것일까? 


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꿈(상상)은 그 세계(실체)로 인해 깨져 간다. 환멸은 세계 자체와는 상관없이 인간 내면에 똬리 튼 환상을 직시하는 순간 찾아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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