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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을 파는 잡화상 Aug 06. 2023

소년의 어둠

김승옥,「乾」

 산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의 습격으로 엉망진창이 된 시(市)에 대해 이야기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나’의 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얼마 크지 않은 이 시를 대강 다 내려다 볼 수 있다.


화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먼 거리에서 시가지를 바라보곤 했는데, 빨치산들의 습격 후 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그 흉측한 몰골을 드러낸 시(市)의 모습 속에서 추한 세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옛날에는 대부호가 살았던 저택이었지만 지금은 시 방위대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에서 ‘나’는 미영이와 예쁘고 순수한 시간을 보낸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곳 안방 다다미를 열고 들어가면 나오는 지하실에서 아이들과 뛰어놀던 기억은 순수하다. 그림을 그리면 아이들이 감탄과 더불어 자신의 그림처럼 아껴주던 시간이었으며 미영이를 안아버린 로맨스까지 곁들인 유년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나’가 세계의 불화를 목격하기 바로 전의 순수한 시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빨치산의 습격 후 ‘나’는 빨치산의 시체를 이상한 흥분에 싸여 목격하고 묘한 느낌을 갖는다. 이 대목에서 ‘나’의 내면 안에 뭔가 어두운 세계가 찾아왔거나 그 세계를 대면한 ‘나’의 변화가 감지된다. ‘나’는 약간의 돈을 받는 대가로 그 시체를 묻는 작업을 하는 아버지와 형, 형 친구들 사이에 끼어든다. 죽은 빨치산은 가난한 노파의 조카로 밝혀지고, 노파가 죽은 조카의 얼굴을 한없이 매만지는 것을 목격한다.


땅을 파고 관을 내려놓았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그 관에 돌을 던지는데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점점 돌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노파의 원망스러운 눈빛도 외면한 채 격렬한 돌팔매질을 하다가 아버지의 제지에야 멈춘다. ‘나’는 세계의 거대한 폭력에 눈을 떠버린 것이다. ‘나’의 이런 변화는 형과 친구들이 옆집 윤희 누나를 겁간할 목적에 협조하게 된다. 순수한 도화지처럼 생각하는 윤희 누나가 짓밟히는 것에 암묵적 동의를 한 후 ‘나’는 미영이와 보냈던 시간에서 더 멀어져 간다.


거짓말 심부름을 한 후 점점 더 큰 어둠을 받아들인 ‘나’는 미영이네 집에 가 담에 걸터앉았다가 내려와 시립병원의 폐허를 구경하기로 한 약속이 생각나 그곳으로 달려간다. ‘나’의 성장은 결국 폐허를 받아들이는 것인가?


「乾」은 하늘, 마르다 등의 뜻을 갖고 있는 한자다. 이 제목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순수한 시간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성장은 상상력의 고갈과 더불어 환멸의 수용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일까? 소년이 그 하늘을 밟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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