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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을 파는 잡화상 Aug 21. 2023

구원의 글쓰기

이승우,「일식에 대하여」



소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독자의 시선을 쉽게 다음 단계로 넘겨주지 않는다. 서사가 전개되긴 하려나?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다. 그래도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 법이니 성급하게 물을 찾아본다. 하지만 목이 마른데 물을 주지 않고 다른 것을 준다. 그렇다고 탄산음료도 주스도 아니다. 입안에 넣고 한참을 굴리다가 천천히 목으로 넘겨야 하는 그 무엇이었다. 답답하게 여겨질 만큼 천천히 이어지는 문장은 생각의 속도를 보여주고, 그것은 의식의 속도를 보여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속도에 맞춰 읽어나가다 보면 꼼꼼한 주인공 머릿속이 점점 더 궁금해진다. 이 사람은 참 힘들게도 산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자가 또 어떤 식으로 머릿속의 생각 퍼즐을 맞춰나가고 또 무슨 꿍꿍이 같은 추리를 하려나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다방 한구석에 틀어박혀 지루하게 축 늘어진 일상을 어쩌지 못해 시간을 죽이는 것 같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다른 삶이 전개되는 것이다. 일상보다 더 절실한 관념의 일상이. 그 속도를 따라가야지만 소설의 결말이라는 봉우리를 넘을 수 있는 것처럼 독서는 천천히 이루어진다.


주인공 ‘나’는 엉망이 된 서울에서의 삶을 피해 길흥으로 도망친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외진 지역 길흥 출장소로 전출을 요구해 내려온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그가 피해 온 것은 서울이 아닌 자신이 붙들려 있었던 참담한 현실이었다. 현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싶어서. 더 이상 ‘나’의 아버지와 함께 살 자신이 안 생겼기에. 아버지는 ‘나’를 옭아매는 족쇄이고, 가장 더러운 환부였기에, 그 족쇄를 풀고 그 환부를 도려내기 위해서였다. 방에 갇혀서 짐승처럼 꽥꽥 울어대는 정신병자인 아버지로부터 분리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1. 수직     


수직선은 날카롭다. 내리꽂는 수직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자들은 공격적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수직선에서는 목숨을 건 생존경쟁이 벌어진다. 그 싸움의 승패에 따라 서열이 생기고 권력관계가 발생한다. 그래서 인정사정없는 신은 수직선 맨 꼭대기에서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앉아 있는 보좌 가까이에 가려고 인간들은 충성경쟁을 벌인다. 이 지점에서 욕망과 죄가 발생한다. 신의 아들이 되고 싶어 하는 이들. 그러나 그 자리는 아무나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피투성이 희생제의가 따른다. 희생제의를 거치지 않고는 신의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들에게 저주 내릴 십자가 처형을 기획한 것은 아버지 신이다. 아버지는 더 큰 계획을 위해 아들을 제물로 스스로에게 바친다. 아들은 또 그런 아버지의 잔인성을 체념적으로 수용한다. 이것이 수직선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아버지란 무엇인가? 소설을 읽다 보면 계속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도대체 아버지의 쓸모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아버지. 나를 만든 근원이자 처치 곤란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 때문에 삶에 곤궁을 겪는 자식들이 도망(‘나’, 미스지, 미스 윤) 친다. 길흥은 그런 지역이다. 아버지로부터 도망친 길흥에서는 시간도 하품을 하고 기어 다닐 것만 같다. 흐르는 것이 아닌 고여 있는 시간. 그래서 그곳에서는 주변의 삶들이 보이고 그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갖게 된다. 비로소 삶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존재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위하식의 아버지는 총명한 둘째 아들을 위해 첫째 아들을 희생시킨다. 둘째가 권력투쟁에서 더 유리한 두뇌를 갖췄기 때문이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욕망의 아바타가 되어 희생된다. ‘나’는 미친 아버지 때문에 인생의 중심이 되어준 승미와의 관계가 뒤틀릴 위험에 처하고, ‘위동식’은 평생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죽은 형의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이들의 상처는 아버지로부터 발생한다.


산기슭 하숙집에서 ‘나’는 새벽이면 이상한 소리를 듣기 시작하다 그 소리의 정체를 찾아 나선다. 괴성의 당사자가 사는 산기슭의 별장의 혹처럼 딸린 방에 유폐된 고위직인사 위하식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들 가족사에 얽힌 비밀을 알지만 만족하지 못한 ‘나’는, 돌봄이 미스 윤이 떠나는 날, 찾아온 승미를 데리고 마침 일식이 일어난, 시간에 월담을 해 그 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음과 같은 깨달음에 도달한다. 어딜 가나 아버지는 편재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죽지 않는다는 뼈아픈 자각.     


“모든 아버지는 닮았다. 모든 아버지는 흉물이고, 끔찍하고, 거추장스럽다. 아버지는 죽어버린 시간의 폐쇄된 성에 유폐되었거나 또는 그 시간의 수갑에 묶여 부끄럽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는 언제나 지나간 과거의 시간이 벗어던져 버린 허물에 불과하다. 그는 그저 지겨운 짐이고, 이 방의 구조가 암시하고 있는 대로 혹과 같은 존재이다. 보기 흉하고 거추장스럽지만 혹은 또한 자신의 피부-자신의 삶의 일부분이어서 결코 함부로 제거해 버리거나 도려내거나 할 수 없다. ‘아버지는 죽지 않는다. 단지 사라질 뿐이다.’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순 없다. 단지 그를 잠시 동안 가릴 수 있을 뿐이다. 아들은 어김없이 패배한다. 뻔한 싸움이다. 아버지는 대부분의 경우 아들에게 그런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아버지는 닮았다. 모든 아들들이 닮았듯이....”      


  수직에서는 살부 의식이 번뜩인다. 오이디푸스처럼 실제로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는 일이다. 수직은 그런 지점이기 때문이다. 수직으로 내리 꽂히는 잔인성이 허용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방에 갇히고 만다. 그들은 아들의 세계에서 제거되어야 하는 과거이자 벗어버린 허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근원, 자신의 일부이기에 아버지를 제거할 수 없는 존재이고, 결코 죽일 수 없어 일식처럼 아버지를 잠시 가릴 뿐이다. 그것이 아들이 아버지와의 싸움에서 지는 이유이다. 아버지를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아들은 언제나 아버지에게 패배당한다.     


2. 수평     


아버지를 닮은 아들들의 원죄의식과 이 패배감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수직에서는 도저히 패배감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그들은 아버지를 징그러워하고 끔찍해하면서 숨이 막힌다고, 살고 싶다고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수직선의 상상력은 죽이거나 밟고 밟히거나 강요와 복종이 주를 이룬다. 그들은 아버지를 죽일 능력도 아버지를 살릴 능력도 없을뿐더러 돌볼 능력도 모자란다. 그들에게 구원은 어디에서 오며 어떻게 가능할까. 수평이다. 수평의 상상력. 수평의 관계성. 수평적인 사유. 그것이 수직선상에 구원이 가능한 지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신의 아들이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서 양팔을 벌려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지점을 만들어 냈듯이, 수직에 수평선을 겹칠 때 잠깐이라도 구원이 가능한 지점이 생길 수 있다.


신의 아들은 아버지가 하지 못한 일을 해낸다. 그리고 그 자신이 아버지 신을 대체한다. 그는 인간의 원죄를 피 흘림 없이 사하는 기적을 베푼다. 어린양의 피흘림이 아닌 이웃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치르고 죄 사함을 얻게 만든다.


그렇게 볼 때 ‘나’의 어머니와 승미는 수평에 위치한다. 아들이 견딜 수 없어하는 미친 아버지를 돌보는 것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다룰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 연민과 사랑으로 아들의 아버지를 돌본다. 어머니는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아버지의 폭력과 발작 앞에서 어머니는 팔자와 운명만을 자꾸만 곱씹고’ 시댁 친인척들의 터무니없는 태도는 ‘그녀를 더욱 침울한 숙명주의자로 만들었’다.


신의 아들이 그러했듯이. 아들을 구원할 수 있는 지점은 아들의 수평 의식에 어머니의 수평이 겹쳐질 때이다. 아들은 짐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버리고 싶어 하지만 어머니는 그 짐을 묵묵히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간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부채감을 갖는 이유다. ‘어머니의 그 비감하고 쓸쓸한 목소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 넘길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은’ 자기 같은 사람을 ‘잔뜩 주눅 들게 만들고, 그래서 나는 늘 그 목소리를 감당 못해 거북해’한다. 어머니는 ‘나’와 같은 아들에게는 모순덩어리이다. 때로 거칠게 화를 내고, 그 불쌍한 분에게 화를 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이 더할 수 없이 미워져서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승미 역시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수직에서 일어나는 애증과 혐오와 모멸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함께 걸어가려 한다. ‘나’의 아버지에 대한 정체를 알고도 ‘나’를 찾아 길흥으로 내려온 승미는 ‘나’가 이끄는 대로, 영문도 모르고 산기슭 별장에 들어간다. 그 집의 혹 같이 딸린 방에 똥오줌으로 범벅이 된 채 누워 있는 위하식의 아버지를 씻기는 이는 승미이다. 그가 위하식의 아버지에게 손이 잡힌 채 있는 동안. 아들을 죽게 만든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위하식의 아버지와 그 방을 씻기고 치우는 승미의 행동은 그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직에 수평이 가 닿을 때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비로소 구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구원은 여성들의 어깨에 짐 지워졌다. 신의 아들이 자신의 두 어깨에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듯이, 어머니와 승미는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죄를 씻기기 위해.        

  

희생과 헌신의 행동이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한 세계가 글쓰기 없이는 구원받지 못하는 일상에 대한 메타포로 읽혔다. 짐승 같은 아버지들의 세상이나 길흥처럼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반복적인 일상이 우리의 의식을 마비시켜 나갈 때, 글쓰기는 마비된 의식에 균열을 가하고 짐승 같은 세계에 대해 자각하는 시간이다.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불효를 우회적으로 꾸짖는 방식이나 정작 중요한 내용일수록 암시하듯 어렴풋이 말하는 것은, 글쓰기의 속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방에 유폐된 아버지를 돌보는 어머니나 승미는 소설가에게 글쓰기는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골방에 갇힌 아버지가 소설가의 내면이나 원죄의식이라면 소설 쓰기는 그 더럽혀진 방을 치우고 씻어 내리는 작업일 것이다.



인간이 고상하려고 애쓰는 시간은 사유하려는 시간들이다. 이 느리고 더딘 언어의 세계가 그나마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고 격을 높이기 위해 잡을 수 있는 동아줄이 될 수 있다면, 그 역시 언어의 사유적 기능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명명했듯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진실이 실리지 않는 말의 범람이 사회를 위태롭게 하는 이유이다. 언어가 타락하면 사회가 타락한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지배자들의 말에 비중이 실릴 때 그 사회는 불행의 늪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언어는 대개가  타락의 언어다. 그들은 일방적이고 수직적이다. 그리하여 사회의 정화는 언어에 대한 사회적 자의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문학과 예술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회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난맥상은 수직의 범람에서 기인한다. 수평은 외면당하고 억압받고 평가절하 된다. 수평적 사유의 부재가 너무 캄캄해 앞을 가늠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세계의 불합리 앞에서 어떤 형태로든 길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수평적 세계관임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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