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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을 파는 잡화상 Nov 27. 2023

저만치

-김소월, <산유화>의 '저만치'에 대한 소고


산유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민중서림의 국어대사전에서 산유화(山有花)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①<<악>>메나리의 한 가지. 백제의 서울 부여에서 예로부터 전하는 노래라 하며, 조선 숙종 때에 널리 유행하였다 함. ②<<악>>메나리의 한 가지. 영남 지방에 전하는 민요.

경북 선산읍의 한 색시가 남편에게 소박을 당하고 낙동강 물에 빠져 죽으려고 할 때에 나물 캐던 계집아이를 만나 노래를 지어 가르쳐 주고 부모에게 전해 달라 이르고 죽었다 함. ③<<문>>김소월이 지은 서정시(抒情詩).      

 

메나리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기 위해 다시 민중서림의 국어대사전을 의지하여 메나리에 대한 두 가지 정의를 찾아보았다.     

 ①메나리¹ (명)농부들이 논에서 일을 하며 부르는 농가(農歌)의 한 가지.

 ②메나리² (명)<방>①미나리(경남·충청·강원). ②며느리(강원·경남·전라)


 사전에는 산유화(山有花)라는 꽃의 고유명사는 없다. 그런 이름을 가진 꽃에 대한 정보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실제로나 사전적으로나 산유화란 꽃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다만 김소월이 지은 서정시(抒情詩)에서 고유한 꽃일 가능성을 찾아볼 뿐이다.

    

 그럼에도 대개는 산유화가 꽃의 이름이거나 산에 피는 꽃으로 지레짐작한다. 김소월의 힘일 것이다.


산에는 꽃 피네/꽃이 피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피네


1연에서 이 시를 읽는 이는 산에 피는 꽃인 산유화(山有花)를 받아들이게 된다. 김소월 시인의 위대함이 여기 있지 않을까? 시인은 없는 것을 있게 했다. 즉 호명에 성공했으며 그 호명으로 새로운 존재를 창조해 낸 것이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소월 이전에 산유화(山有花)는 음악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농가(農歌). 또 그 음악은 소박당한 여인의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기도 하고, 며느리라는 뜻을 지니기도 한 메나리(농가)였다.    

  

 이를 토대로 김소월의 <산유화(山有花)>에 대한 생각을 부풀려 보기로 한다.

      

 먼저 애매하고도 의도적인 의심을 품어본다. 김소월이 말하는 산(山)이 산(山)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 산은 또 다른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시적(현실적인 억압)인 산이 아니라 비가시적(억압에서의 해방)인 산(山)을 끌어오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얼토당토않은 일만은 아닐 듯 싶다. 그래서 꽃은 ‘저만치’ 피어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김소월이 산유화(山有花), 즉 메나리라는 농가(農歌)나 그에 얽힌 사연을 염두에 두고 썼을 가능성이다.      

 

이 시에서 산에 피는 꽃은 함께 무리 지어 있을 것 같은데 꽃은 저만치 혼자서 외롭게 피어있다. 왜 그럴까? 사전적 정의에 기대어 생각해 보자. 농부들은 논밭에서 일을 한다. 농부들이 하는 일은 주로 여럿이 힘을 합해야 하는 일들이다. 그들은 힘든 노동을 잊기 위해 노동요를 부른다. 그런데 그 삶의 현장에서 비켜 나가있는 곳에 꽃은 피어 있다. 농부들은 ‘저만치’에서 한가로운 그들을 동경한다. 가보고 싶지만 그곳에 가려면 집단과의 결별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외로움이다. 집단노동의 고단함을 떠나 있을 수 있지만 그로 인해 집단에 속하지 않는 자의 거리가 바로 ‘저만치’이다.

     

또 있다. 타율에 의해 살아야 하는 한 많은 여인의 삶일 가능성이다.


며느리, 아내가 자신을 주장한다는 것은 죽음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으리라. 소박맞은 고달픈 여인은 친정으로도 돌아가지 못한다. 봉건 사회에서 소박은 존재의 박탈이다. 사회적 존재성을 거부당한 것이다. 헤게모니를 쥔 남편(시댁)이 여인에게 죽음을 던져 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여인은 강물에 투신하려고 하다가 나물을 캐는 아이를 만난다. 두 사람 다 산에 있지만 아이는 죽음 건너편에 서 있다.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가 있는 쪽. 삶과 죽음이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 그래서 산 자의 입장에서나 죽을 자의 입장에서나 ‘저만치’다.     


끝으로 ‘저만치’는 근대적 개인성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독립된 주체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클수록 개인은 집단의 일방적 요구와 화목하기 어렵다. 개성은 개인적 시공을 인정해야 성립 가능하다. 저 수많은 ‘혼자’들이 각자의 ‘저만치’에 떨어져 있을 때 개성이 발생하고 현대성이 확보된다.      


그리하여 김소월의 ‘저만치’가 우리에게 던져 준 것은 정서만이 아닌 실존의 방식에 대한 질문이자  존재론적 고투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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