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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을 파는 잡화상 May 19. 2024

삶은 구멍이다

편혜영, 『홀』 (문학과 지성사, 2016)

이 소설은 인간관계와 삶에서 저도 모르게 생기는 구멍에 대한 이야기다.


관계와 존재의 심연 곳곳에 구멍이 나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 크기와 수를 헤아릴 수도 없다. 없는 듯 존재하는 구멍의 실체를 안다면 살면 살수록 사는 일이 조금은 더 쉬워지지 않을까. 그러나 인생은 아이러니다. 사는 일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수다한 구멍들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순간의 사고로 생은 끝나버리고 몹쓸 고깃덩어리 같은 육체만 오기를 이승에 붙들어 둔다. 사고로 떠나버린 아내와 달리 아직 정리할 것이 남은(아마 그러지 않을까. 오기의 불행은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완성하지 못한 죄의 대가일지도 모른다.) 오기는 전신불구가 돼 살아난다. 의식만 선명한 그는 누워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반추한다. 누워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눈을 깜박거리고 생각하는 일 이외의 다른 것은 없었으니. 그러나 그 자연스러운 일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삶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로 변하고, 결국은 자신의 삶을 추적해 나가는 내적여정이 시작된다.


오기는 인간이란 빈구석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것이야말로 내면의 진실일지 모른다는 얘기를 수업시간이나 강연 때 자주 써먹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인 바빌로니아 세계지도 한가운데 생긴 구멍에 매혹되어 대영박물관의 어두운 전시실에 오래 머물렀던 오기 주변에 오기가 인식하지 못한 구멍과 인식한 구멍들이 서서히 모여든다. 그가 확신범처럼 자신의 생각을 강화시켜 나가서였을까? 그것들은 합종연횡하여 급기야 오기를 압박한다. 이제 구멍들은 하나의 거대한 블랙홀로 변신한다. 사고를 가장한 블랙홀에 꼼짝없이 갇힌 오기의 생.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오기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볼수록 그 잘못의 근원은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이 선명해진다. 오기는 혼돈에서 시작해 선명한 한 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하다. 아내를, 아내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그런 아내에게 어떤 위로도 돼 주지 못했다는 깨달음. 하지만 그것은 깊고 어두운 구멍에서나 보이는 것이었다.


삶은 구멍이다. 산다는 일이 구멍을 만드는 일이자 빈구석을 갖는 일이라고 한다면 삶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이 책이 던지는 질문 같다. 삶이 구멍투성이인 사람에게는 너무 아픈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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