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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화상 Jul 07. 2023

소이연(所以然): 그리 된 까닭

오래된 서랍REVIEW _ 김진만의 독립영화「소이연(所以然)」 

 


유토피아란 본디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상태이다. 현실의 모든 제약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그려낸 가장 완벽한 모습이다. 이는 인류의 삶을 고양시키는 하나의 매개일 수 있지만, 문제는 유토피아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지적 수단에서 한 걸음 나아가 현실의 인간과 사회가 무조건 따라야 하는 ‘당위’로 군림하는 것이다, 라고 칼 폴라니는 경계한다.1)


그러나 지배 이데올로기는 유토피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찾아지기를 바라고 어딘가에 숨어 있는 실재인 것처럼 가르쳐왔다. 그런 이유로 손쉽게 상정한 유토피아의 여러 허상 중 하나가  바로 ‘지구’ 자체였다. 보물섬을 발견한 자들의 환호성처럼 그들은 지구를 색다른 시선, 즉 보물(부)의 원천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호 돌봄의 미학으로 관계성을 맺어야 할 인류와 지구는 근대에 들어 점점 더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착취와 억압의 관계가 점점 심화되어가고, 무한경제발전을 감당할 수 없는 초록별 지구가 우리 존재 안에 있음에도, 인류는 늘 무한경제발전을 감당할 수 있는 우리 존재 바깥의 슈퍼지구를 찾으려 심혈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근대의 기획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지구라는 물物 자체가 유토피아임을 인식시키는 것이었고, 이는 나름대로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사람들은, 인간의 몸처럼 지구가 파괴되거나 닳아 없어질 육체성을 지닌, 한계적 상황에 처한 유기체적 존재라는 것을 수용하지 않으려 하거나 외면한다. 이러한 심리적 저항은 무한 경제발전에 대한 욕망의 크기와 비례해 왔다. 자연, 즉 지구는 자기정화 능력이 뛰어나다는 식으로 지구의 회복능력에 대한 과신 역시 고통받는 존재로서의 지구를 외면할 수 있는 적절한 근거가 되어 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성육신이었다면, 이 지구를 하나님 성육신의 또 다른 육체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성육신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듯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지구’라는 성육신을 통해 여전히 자신을 계시하고 계신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 자신의 지속적 고통 받음과 유관하다.


지구의 개체성과 지구의 육체성을 인정하는 일은 그래서 자주 방해되고, 다른 이데올로기로 희석화 되었다. 실재하지 않는 실재, 유토피아로서의 지구는 고통받는 존재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무한히 자신을 착취, 파괴당해도 무궁무진 다함이 없어야 유토피아로서의 성립 요건이 충족되는 탓이다. 하지만 현재의 착취억압 구조 속에서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먼 개체성과 육체성, 유한성을 지닌 지구로 상정할 때, 지구는 인류존립의 실존 속으로 충격적, 즉각적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사건이다. 이는 物로 취급당했던 지구가 物자체로 인류라는 物에 육박해 오는 대 사건이 되는 것이다. 착취당해 파괴된 物과 착취자 物이 충돌하면 그 종국이 어떠할 것인가. 


애니메이션 영화,소이연(所以然)을 그 대답으로 제시해 보자.


도시주변 산림이 CO2를 흡수하는 대신 되레 뿜어내 대기환경을 더 악화시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례적인 이상고온 때문에 나무들은 더위에 적응하기 위해 생장 시스템을 바꾼 것이다. 그 시점부터 자연의 먹이사슬은 역순환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감독 김진만은 연출의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생명 존재는 나름의 이유(소이연; 所以然)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의 근본은 단지 생의 충동, 죽고 싶지 않다는 본성을 지구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다고 본다. 노자는 도덕경 5장에서 天地不仁하여 以萬物爲芻狗라 聖人 不仁하여 以百姓爲芻狗라-[천지와 성인은 인하지 않아 만물과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처럼도 여기지 않는다] 하였다. 자연은 선한 존재거나 인격적 신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닌 치열한 생존 그물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들로 보게 된다. 이 필름은 변종된 생명체들이 파괴된 먹이 피라미드를 역행함으로써 지속되는 자연파괴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감독의 연출의도에 걸맞게 만들어진 이 영화는, 10분의 상영시간 내내 우리가 소름끼치는 장면들을 중단 없이 목격하게 만든다. 기이한 상황에 맞는 기이한 효과음들. 나무들이 역으로 이산화탄소를 뿜어낼 때 공장의 매연들이 가득한 공장밀집 지역을 연상케 하는 것. 


감독은 무신론적인 공간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변종까지 감행하면서 끔찍하도록 공격적이 되어 버리는 생태계의 반란을 보여준다. 결국, 식물들이 동물들을 공격하도록 생태계의 순환을 전도시킨다. 나뭇잎의 무서운 육식성으로의 변종을 보라. 지독한 폭력적 생존의 욕구만 팽창하는 저 지구는 유토피아인가? 아니, 디스토피아다. 그곳에 인간도 신도 없다. 악의 본성 같은 생존욕구만이 과대하게 팽창해 아귀들처럼 달라붙어 서로를 공격하는 시공의 지속이다. 그것은 지옥이다. 유토피아란 지금, 이곳에 없다. 그와 달리 디스토피아는 이미 도래했다. 여기서 디스토피아(영어: Dystopia)는 유토피아와 반대되는 미래의 가상사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단어는 존 스튜어트 밀의 의회 연설에서 처음 쓰여진 것으로 존 스튜어트 밀은 그의 그리스어 지식을 바탕으로 이것이 나쁜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2) 이 사전적 정의에 기댄다면 하나님의 육체성이 드러난 지구가 나쁜 장소가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이는 곧 피조물의 타락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이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과 또다른 육체성인 지구라는 자신을 구원할 것인가.


해방신학자이자 생태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는, 위기는 창조적 계기이며,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고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여전히 꿈은 남아 있다고 보고, 그 꿈은 인간의 실체이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꿈이 새로운 관점을 형성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사고와 창의성에 필요한 열정을 제공한다고 역설한다.3)


예수가 자신의 신성을 잃을 위기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짊어졌 듯, 보프는 생태적 위기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야기하며 위기에 처한 상태계 속으로 진입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는 전체론적 생태학, 즉 소립자의 무한히 복잡한 것(쿼크 모형)우주공간의 무한히 광대한 것, 생명체의 무한히 복잡한 것, 인간 마음의 무한히 심오한 것, 그리고 모든 것에 기원을 주는 원 에너지의 무한한 대양의 무한히 신비스러운 것(하느님 이미지)의 전망에서 모든 것을 그들 사이에 그리고 환경과 관계 짓고 포괄하는 실천과 이론, 관점을 갖는다. 


생태학적 전망에서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존하고, 공존하는 모든 것은 先在한다는 것이다. 공존하고 선재하는 것은 모든 것을 끌어안는 끝없는 관계망을 통해 생존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관계 안에 있고 어떤 것도 관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태학은 모든 존재의 의존성을 긍정할 때 모든 계급 조직을 기능적인 것으로 만들고 강자의 “권리”를 부인하게 된다. 모든 존재는 상대적인 자율성을 중시하고 또 그 자율성을 가지므로 남아돌거나 소외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각 존재는 우주라는 거대한 사슬의 한 고리를 이루고,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한테서 나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4)


이렇게 생각한다면 고통받고 있는 지구는 결국 고통받는 하나님이고, 이 고통은 바로 우리의 고통이 되는 셈이다. 이 고통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삶을 관통했듯이 우리 역시 고통받고 있는 지구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왔고 우리가 갈 곳이 바로 이 지구라는 사실에 대해 인식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좀더 밝은 곳으로 끌어 올 수 있을 것이다. 나쁜 장소가 아닌 좋은 장소가 되는 날을, 꿈으로 매일 이곳으로 끌어오려는 노력, 그것이 유토피아적 현실감일 것이다. 

 

나무들의 이산화탄소 배출은 이미 서울 남산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나무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한 자리에 세워놓으면 죽을 때까지 서 있는, 그 우직하고 착한 나무가 비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니! 그러나 그 비행은 또 얼마나 눈물겨운 자기방어란 말인가. 누가 나무 보고 너의 생명은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생태계 전 지구적 어머니의 명령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방어하고 있을 뿐이니. 식물성의 나라는 언제나 정적만 감돌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소이연(所以然)에서 인간의 이 편협하고 왜소한 상상력은 무력화 되고 있다. 영화  '반지의 전쟁'에서도 나무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온다. 그곳의 나무들은 그래도 동화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연대의 움직임으로 우리에게 미소를 띠게 했지만, '소이연'의 나무들은 그악스럽기까지 하다. 폭력적인 것이다. 마치 생태계의 폭군으로 등장한 듯한 인상이었다. 우리의 푸른 숨통인 숲이 인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제 불모나 폭력 밖에 없다? 만약 그렇다면 인류의 우울의 깊이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겠는가. 이상기온으로 인한 여러 변화들은 지구가 보내는 신호일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는 수만 가지의 방법 중에서 하나일 것이다. 지구인인 우리를 자기 성찰의 세계로 불러들이려는 하나님의 신호 아닐까?


영화는 미학적 실험에 성공한 듯하다. 단면적이지도 설명적이지 않은 압축된 영상은 인간이 자신의 원천인 지구를 불가해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착잡한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인류에 닥칠 디스토피아가 과장되지만 매우 현실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가 걸어다니고 나무가 생태계의 폭군으로 등장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래서 영화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닐까. <所以然>...현재가 그리된 까닭...은 늘 우리에게 있기 마련, 이라고. 


우리의 근원인 ‘지구’라는 하나님의 육체성을 신학적 의제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레오나르도 보프는 생태 신학을 통해 위험에 처한 생태 문제를 끌고 와 신학에 도전한다. 그에 의하면 신학을 하는 것은 항상 이 모든 것이 신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오늘날 제기되는 문제들은 신학으로 하여금 과거의 개념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개념을 고안하며, 새로운 문제의 관점에서- 그동안 체험의 창고에 보관되어 오다가 오늘날 새로운 중요성을 획득하는 -옛 개념들을 현실화하고 고무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은 결국 구원에 대한 전망을 찾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인류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린 생태경제 문제들에 신학적 질문을 던지고 답을 모색하는 일에 긴급해야 할 것이다.  




1)칼 폴라니/홍기빈 엮음,『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책세상)

2)위키백과사전.

3)레오나르도 보프 / 김항섭 옮김, 『생태신학』(가톨릭 출판사 1996)

4)앞의 책, 19.




소이연(所以然)


서울독립영화제2007 (제33회)

본선경쟁작(단편)

김진만 | 2007|Experimental,Animation|35mm|B&W,Color|10min 10sec |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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