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11일의 글
공공 화장실에서 신체적 장애로 인해 배변에 어려움을 겪는 분을 마주쳤다. 별 고민 없이 손으로 등을 지탱해드렸으나 그분은 한사코 괜찮다며 거절하셨다. 그 뒤 귀가를 했고... 뒤늦게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을 시청하다 김연아 선수를 보는 순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다.
기억 하나. 내 친구의 동생은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야 친구에게 동생의 이야기를 좀 듣게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한 가지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아있다. 어머니와 동생이 함께 등산을 갔는데, 마주치는 등산객마다 동생을 딱하고 가엾게 여겼고, 오히려 그것이 친구의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었다고 한다. 정작 친구와 가족들은 동생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슬퍼한 적이 없는데, 그런 동생을 수많은 사람들이 동정하거나 물어보지도 않고 도와주는 것이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요였다.
기억 두울. 2011년께 화제가 된 영상이 하나 있다. UN 세계평화의 날에 참가한 김연아 선수가 옆에 앉아 있던 스티비 원더에게 보였던 배려. 스티비 원더가 마이크 버튼을 찾지 못하자, 김연아 선수는 '도와드려도 될까요?'라고 묻고 허락이 떨어진 후에서야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영상을 보는 순간 굉장히 사려 깊은 행동이라고 생각했고,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런고로 내가 했던 행동은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분께 폭력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 나는 그분께 의사를 여쭙고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선택했어야 했다. 그 순간 내 마음대로 도움을 드린 것은, 어쩌면 배려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편하고자 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