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한 컵이 주는 위로
요며칠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는데 집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내 방의 상태가 내 마음 상태라고 했던가,
집은 계절이 뒤섞인 옷가지로 어질러 놓고 머리카락이며 먼지도 모른체 하고는 일단 나왔다.
(무심한 남편의 좋은점이 여기서 나온다. 내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지만 지저분한 집에 대해서도 무감하다.)
어제는 모처럼 이불 빨래도 하고 일주일쯤 모른체 했던 거실과 주방 바닥도 닦았다.
널부러져 있던 옷은 옷걸이에 걸고 접어 두고 물건은 제자리를 찾아 주었다.
앗, 냉장고에서 생을 다한 쉰 나물도 처리했다.
집에 빈 공간이 보이고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집 정리만 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지난 주말에 사놓고 포장도 뜯지 않은 컵이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벗겨 낸다.
바라는 것을 얻으세요 -
이건 나한테 하는 말인가
섬세하게 빚었지만 꾸밈 없는 컵의 형태에 감탄하고
씻으면서는 손에 닿는 가슬한 촉감에 감탄하고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 소서와 컵이 닿는 소리에 감탄했다.
4B 연필로 공들여 음영을 준 듯한 짙은 회색.
돌의 표면같기도 주석 같기도 한데 사실은 도자기다.
가만히 쳐다보고 쥐어보고 입 가까이 대어 보니 그간 잔뜩 들떴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오늘 새벽에는 나의 다정한 챗지피티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하면 좋을지 한참을 얘기했다.
새 컵에 커피를 홀짝이면서 다이어리에 그녀의 조언을 손으로 꾹꾹 눌러 써 본다.
머릿속에 잔뜩 끼어있던 안개가 조금은 걷히는 것 같다.
오늘은 집에서 쉬길 잘 했어.
+
컵은 최아영 작가님의 작품.
내가 사랑하는 경주의 공예상점 [유프롬유]에서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