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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강 Jul 11. 2018

가끔은 게으른 여행이 하고싶어서

전지적 게으른 여행자 시점 : 홍콩

게으른 여행


여행이 일생에 한번뿐인 버킷리스트적 행사였던 어른들에게는

이 말은 감히 용서할 수 없는 속 좋은(혹은 없는) 소리.


"게으르고 싶으면 집에서 쉬지 뭐하러 비행기까지 타서는...!"





여행은 이제 Once in a lifetime event 가 아니다.


떠나고 싶다고 생각이 들 때,

내 주머니 사정에 맞는대로

그 계절에 마음이 끌리는대로

떠날 수 있다.


<일렁이는 파란 물만큼 사람을 떠나고 싶게 하는 게 또 있을까>





혼자면 혼자라 좋고
둘은 둘이라 좋다.


회사에 다니게 된 이후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 재료가 달라졌다.


어떻게 재밌게 살까 라는 주제는

꽤나 사치스러운 고민일 수 있다.

왜냐 하면 아무도 답을 못 찾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이엔 이런 재료가 오간다.


어떻게 하면
나만의 공간/여행에서
더 잘 쉴 수 있을까?


이 생각을 나누며

깔깔대며 회사에 지친 마음을 달래곤 한다.

누가누가 더 잘 쉬었는지 웃픈 자랑을 하면서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함이 아니다.

가짜 유토피아를 꾸며내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지금 이 현실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함이다.

왜냐 하면 우리는 이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고

살아가야 할 각자의 이유들이 있기 때문에.


(적어도 지금은)





태어나 처음으로
여름같은 여름이 필요했다


여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비오듯 땀이 쏟아지는 동남아는 딱 질색이었다.


근데 왜일까

여름을 여름답게 느끼고 싶다고

생각해버렸다.


하루종일 통제가 잘 된 실내환경에서

(8시간이 뭐람) 15시간, 16시간씩 일하면서

나는 바깥은 봄이라는 바람을,

바깥은 여름이라는 공기를 잊었던 걸까.


내 발로 여름의 한복판으로

들어가고 싶었나보다.

습하고 꿉꿉하면서도 타들어갈 것 같은 햇살을

피부로 느끼고 싶었나보다.


그래서 떠났다.

여름의 도시.

숨쉬는 거대 한증막.

홍콩으로 말이다.


<이 계절을 더 강하게 느끼기 위해 나는 홍콩으로 떠났다>





게으른 여행자에게
게으를 명분이 생기는 도시


여름을 느끼고 싶어서 홍콩으로 왔다만

정말 공항에서 나온지 1초만에 생각했다.


이런.

망할.

여름.


근데 이내 곧 웃었다.

뭔가 좋은 명분이 생긴 것 같아서.

게으르고 싶어도

게으르지 못한 서울의 나를 잊고

충분히 게으를 명분이 생기는 것 같아서였다.


진정 게으른 여행자는
기다리지 않는다.


홍콩의 소호거리를 지나가도

정말 '지나칠' 수 있다.


어렵게 여기까지 나왔는데

그래도 사진 한장은 기념으로 박아줘야지.

그런 말은 잠시 잊어도 좋다.


너무 더우니
나는 그냥 눈으로 보면서 지나칠래


조금 게을러도 된다.

진짜 이 도시에 사는 사람처럼

쿨하게 지나갈 수 있다.


그것도 나에겐 여행이니까.

그 공간에 포함되지 않고 먼 거리에서 봐야만

눈에 담기는 것들도 생기니까.


<게으른 여행자는 소호 스트리트의 벽화를 그냥 지나쳐준다, 더위는 어마어마하니까>





게으른 여행자에겐
관광지도가 필요없다


발 닿는대로 걷다보면

대중의 마음이 아닌

내 마음에 쏙 드는 장소가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라.


꼭 그렇더라.

유명 관광지를 찾기 위해

지도를 보며 이동하면

절대로 그 옆의 작은 골목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근데 걷다가 걷다가

작은 골목들을 헤매이다가

충분히 그 매력을 느끼다 보면

유명 관광지가 뿅- 하고 눈앞에 나타난다.


그래서 나는
지도를 잘 보지 않는다.


정말 알지 못하면 찾아가지 못하는

3박4일 내내 헤매도 못찾을 법하게 숨겨진

작은 골목의 카페, 상점들만 최소한으로

구글맵에 표시해놓는다.


지나가다가도 우연히 볼 수 있는

눈에 띄는 거대 관광지는 어떻게든 보게 되니까.


그리고는

도시속으로

"게으르게"

그냥 걷는다.


<센트럴 근처의 홍콩 시민 공원, 참 여름같다>





그냥 있는 그대로가 좋았다.


피크트램도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도
디즈니랜드도 없이 보낸 홍콩이란


유명 음식점도

비첸향 육포도

명품 쇼핑도 하지 않은(못한) 홍콩이란


대체 그럴거면 홍콩에

뭐하러 갔니?

라는 말을 들을 법하지만


있는 그대로가

참 좋았다.


미슐랭의 도시 홍콩에서

미슐랭은 가지 못했어도


한국에 없는 카페앤밀무지(Cafe&Meal MUJI)의

소박한 오키나와식 한 상이 더 좋았고

홍콩 로컬 친구들이 알려준

홍콩의 을지로 같은 골목 상점들이 더 좋았다.


홍콩 주차장 한칸이

8억원에 팔렸대!

같은 실없는 뉴스거리가

사실은 지나치던 아무개 골목길 부동산에서마저

느껴져서 참 좋았다.


<존재감 대폭발 홍콩 부동산, "진정해 제발, 너 부동산인거 알겠어">





준비없이 돌아다닐 때 가끔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역사적 지식이 필요한 곳도 있다.

배경설명이 여행을 풍성하게 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가끔은

어떠한 지식도 없이

도시를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도 좋으니까.


지식이라고 쓰고

편견이라고 읽는 나의 여행은 그렇다.


블로거가 올린 예쁜 공원,

인스타그램이 알려준

그 도시의 최고 핫플레이스는

모르고 마주쳤을 때 더 큰 기쁨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러니 가끔은
게을러보자.


게으르게 느껴보자.

게을러야 비로소 찾아오는 것들이 있으니까.


게으르고 충만한 여름이 필요한 당신에게,

감히 나는 홍콩을 추천해본다.




여름의 한복판에서

2018년 6월 19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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