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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ie Jul 19. 2023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착한 아이가 성년이 되면 인생이 망하는 이유


인터넷 커뮤니티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고 해보자.


 ‘썸 타던 남자랑 헤어지고 만난 첫 번째 남자는 제가 보는 눈앞에서 자살했어요. 두 번째 남자는 그의 친구였는데, 유부남이었지만 가정을 정리할 생각이 없었죠. 세 번째 남자는 화류계에서 만났는데 제 돈을 들고 튀려고 해서 죽였어요. 도망 다니다가 만난 네 번째 남자는 이발사였는데 한 달 동안 함께 살면서 아주 행복했답니다. 출소한 뒤 만난 다섯 번째 남자는 야쿠자예요. 이제는 그가 감옥에 갈 차례네요. 저 이 남자 끝까지 기다려도 되겠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주인공 카와지리 마츠코의 일생을 연애담으로 축약해 적어보자면 이렇다. 댓글창이 온갖 원색적인 비난으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

‘글쓴이는 남자에 미친 사람인가요? 왜 남자 없이 혼자 인생을 설계할 생각은 없죠? 이러니까 자기 팔자 자기가 스스로 꼬는 거예요. 글쓴이는 지능이 어디 모자란가? 왜 이러고 살아요.’


실제로 이 영화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의 리뷰에는 남성의 폭력에 노출된 여성이 나오고, 여성을 성적 도구로만 소비하는 것 같아 불쾌하다는 내용도 있다. 물론 나 또한 그러한 묘사가 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성 혐오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혐오’의 카테고리로 규정짓는 하찮은 인생의 일면은 얼마나 ‘혐오스럽지 않은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는 영화다.


영화는 마츠코의 죽음부터 시작한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 공터에서 발견된 마츠코. 누가 그녀를 죽였을까? 범인을 추리해 나가는 화자로 조카 쇼(에이타)가 등장한다. 이제 막 실연당한 20대 백수 청년 쇼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큰 고모 마츠코의 유류품을 정리하게 된다. 아버지는 오래전 가출한 누나의 삶을 별 볼 일 없는 인생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바로 그 별 볼 일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백수 청년 쇼는 고모 마츠코의 지난 인생이 궁금해졌다. 인간 카와지리 마츠코에 대해 알아가면서 쇼는 제3의 관찰자이자, 때때로 마츠코의 마음을 이해하고 변호하는 대변인이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카와지리 마츠코’라는, 누군가에게는 혐오스런 일생으로 평가받았던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로한다.


세 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마츠코는 항상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칭찬받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했고, 아버지가 원하는 학교에 진학했으며, 아버지가 원하는 직업인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무뚝뚝한 아버지의 온 신경은 언제나 몸이 약한 둘째 쿠미에게 향했다. 하루하루 성장해 가는 마츠코를 볼 때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쿠미가 걱정될 뿐이었다. 어린 마츠코는 아버지를 잠시나마 웃게 하기 위해, 희극배우들이 짓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매번 웃음 짓던 아버지도 마츠코가 성년이 되어 기모노를 입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주던 날 만큼은 웃을 수 없었다. 쿠미가 기모노를 입은 모습은 볼 수 없을지 모른다며, 평소라면 함박웃음을 지었을 마츠코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에도 장난치지 말라고 정색한다. 그 뒤로 마츠코는 코너에 몰리는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버릇이 생겼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 버릇을 고칠 수 없었다. 언제나 칭찬에 배고픈 마츠코에게 비난과 같은 불편한 순간이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순간을 한시라도 빨리 모면하는 것이 중요했다. 방년 23세의 중학교 선생님이 되어서도 위기의 상황일수록 문제의 본질을 철저히 이해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마츠코는 반 학생이 돈을 훔친 범인으로 지목되어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들자, 마음이 급해졌다. 그리고 사태 수습을 위한 미봉책을 떠올린다. ‘돈이 없어졌으니 일단 돈을 채워서 돌려놓자. 부족한 돈은 잠시 빌리고 아이의 자백을 받아 돈을 돌려받으면 그 사이 빌린 돈까지 다시 돌려주고 괜찮겠지.’ 하지만 세상 모두가 마츠코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며, 냉정한 잣대에서 마츠코의 행동은 절도였다. 성숙하지 못한 어른 마츠코의 일생은 사회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지기 시작했다.


마츠코는 소위 말해 어른들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 것 외에 자기 인생의 목표를 세워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항상 그 비교대상은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동생 쿠미였다. 아픈 쿠미가 안타까우면서도, 자신과 달리 온종일 침대에 누워 아버지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동생이 미웠다. 쿠미에게 늘 미안하면서도 쿠미가 싫었다. 학교에 사직서를 내고 가출하던 그날에도 이 모든 것이 쿠미를 대신해 자신이 교사가 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불운인 것만 같았다. 매번 아버지의 칭찬을 받지 못했던 것도 결국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이 생긴 것도 모두 다 쿠미 너 때문이라고.


마츠코는 스스로 무엇을 잘하는지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재능을 조금이라도 칭찬해 주면 그 길을 따라갔다. 첫 번째 진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교사로 시작했다. 두 번째 진로는 자신에게 상처 주고 떠난 남자의 한마디 때문에 화류계에 들어갔다. 세 번째 진로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던 남자에게서 배운 미용 기술을 갈고닦아 미용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 어느 길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사랑은 받을 수 없었고 마츠코는 다시 방황했다.


마츠코는 말 그대로 폐인이 되었다. 더 이상 쓸모 있는 인생이 아니라고 이미 수도 없이 외쳤다. 몇 번째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때쯤, 우연히 감방 동기 메구미와 재회했다. 메구미는 도망가는 마츠코를 붙잡고 자신의 명함을 손에 꼭 쥐어준다. 젊은 시절 마츠코가 메구미를 위로해 주었듯이 이제는 메구미가 마츠코를 돕고 싶다고, 마츠코는 충분히 재능 있는 사람이니까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꼭 연락하라고 신신당부한다.


처음에는 메구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던 마츠코도 점차 마음이 바뀌게 된다. ‘그래 내가 미용에 소질이 있었지, 우리 쿠미 머리도 예쁘게 해줘야 하는데, 메구미에게 연락을 해야겠구나.’ 생각했을 무렵,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동생과도 화해하고 자신의 재능도 다시 깨닫게 된다. 메구미를 찾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야속하게도 인생의 타이밍은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마츠코를 떨군다.


마츠코는 일평생 아버지의 관심을 받지 못해 속상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의 방식으로 마츠코를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남몰래 찾아간 집에서 마츠코는 자신의 가출 이후 아버지의 일기 마지막에 매일같이 반복되어 적힌 문구를 발견한다.

‘마츠코 연락 없음’ —


마츠코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애초에 두 자녀를 동등한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쿠미를 예뻐하는 것은 사실 연민에 더 가깝다. 선생님이 된 마츠코가 쿠미에게 썸 타는 남교사와의 일화를 들려주자, 아버지는 평생 연애도 못할 아이한테 무슨 짓이냐며 마츠코를 꾸짖는다. 엄밀히 따져보자면 아버지가 쿠미를 마츠코보다 더 아껴서가 아니라, 쿠미는 불쌍하고 가엾은 아이라는 동정심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아버지의 시나리오에 쿠미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연애를 한다는 가정은 없다. 무뚝뚝한 아버지는 내면의 사정을 일일이 마츠코에게 설명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단지 아버지가 마츠코에게 ‘잘했다’ 한마디 칭찬을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했다면, 마츠코가 그토록 아버지의 관심에 목말라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 중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작품이 있다. 명망 높은 판사로 살았던 이반 일리치는 어느 날 어이없는 사고로 원인 모를 불치병에 걸린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죽음에 관심이 없다. 동료들은 그가 죽으면 인사발령은 어떻게 될까 벌써부터 상상한다. 가족들조차 남겨진 유산 외에는 그의 마지막에 관심이 없다. 의료진에게도 그는 그저 스쳐가는 환자 중 한 사람이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이토록 허망하고 의미 없는 일인가 탄식한다.


어린 아들을 제외하고 세상에 단 한 사람, 이반 일리치가 그동안 가장 천하게 여겼던 하인 게라심만이 그의 곁을 진심으로 지켜줄 뿐이다. 왜 이렇게까지 자신의 마지막을 돕느냐는 이반 일리치의 질문에 게라심의 답변은 생각 외로 간단했다. 자신이 이렇게 하고 나면 다른 누군가도 자신의 마지막을 위해 같은 선택을 해주지 않겠냐는 마음 하나밖에 없다고. 게라심이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일생을 의미 있는 여정으로 만들어주었듯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쇼의 시선에서 마츠코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츠코는 전 일생을 통틀어 언제나 누군가의 인생에 무한한 사랑과 용기를 주었던 사람이었다.


물리적인 나이와 성숙의 정도는 비례하지 않는다. 인생의 지혜도 마찬가지다. 삶은 늘 항상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정답은 없지만 정답에 가까운 다양한 삶의 방식을 대입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적으로 독립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누구나 미성숙했던 마츠코가 될 수 있다.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어른 누구나 마츠코일 수 있다. 스스로 무엇을 잘하는지 뚜렷한 확신이 없고, 언제나 누군가에게 기대어 무한한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 그 누구든지 해당될 수 있다.


이 영화에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보다 더 잘 어울리는 제목은 없을 것 같다. 참으로 쉬운 혐오의 시대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누군가의 인생 고민 글은 하루아침이면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기사화된다. 포털 메인 페이지에 다시 올라 가루가 되도록 욕을 먹는다. 고심 끝에 써내려 갔을 누군가의 마음속 이야기는 가십의 대상이 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때로는 이렇게까지 글쓴이가 욕을 먹어야 하는 일인지 안쓰럽기까지 하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단편만 보고 전체 인생을 쉽게 재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권한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은 모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을까?


마츠코가 다시 재기하기 위해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부여잡았을 때,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마츠코는 드디어 어른이 되었다. 더 이상 아버지의 관심을 바라는 아이도 아니었고, 동생이 미운 언니도 아니었다. 이성과의 사랑이 중요한 사람도 아니었고, 내 손으로 잘할 수 있는 일의 가치를 느끼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세상에 단 한 사람, 마츠코의 조카 쇼가 이해하고 있었다.


스쳐가듯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쇼의 전 여자친구의 마지막 한마디가

마츠코의 일생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주요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인간의 가치란 건

누군가에게 뭘 받았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뭘 해줬냐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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