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세상 가득 짊어진 어른의 무게
내 첫 마블 영화는 <캡틴 아메리카:윈터 솔져>였다.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 2편에 속하는 이 영화는 <어벤져스> 1편의 성공 뒤에 개봉했다. 당시 회사 동기들이 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가서 따라갔다가 본 영화였는데, 재미가 없었다. 전후 이야기에 대한 아무런 학습이 되어 있지 않다 보니, 등장인물들이 왜 싸우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만해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이른바 MCU라고 불리는 마블 영화의 세계관은 전혀 관심 밖이었다. 다들 재미있었다는데 왜 나만 재미없게 본 것인지 조금 억울해졌다. 그래서 이전 마블 시리즈 영화를 보고, 다시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봤다. 그제야 없던 재미가 생겼다. 각 캐릭터의 솔로 무비들을 하나씩 보다 보니, 도저히 정이 들지 않을 것 같았던 마블 영화 속 캐릭터들에게도 연민이 생겼다.
그중 가장 좋았던 캐릭터는 토니 스타크, 아이언맨이었다. 가장 거만하고 가장 이기적인 인물처럼 보였던 아이언맨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캐릭터였다. 어벤져스의 리더는 캡틴 아메리카였지만, 항상 바른말, 예쁜 말만 하는 성인군자 캡틴과는 달리 아이언맨은 자기만의 언어로 정의를 실천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인간으로서의 고뇌도 담겨 있고, 세계 평화를 위해 결정한 선택이 불러오는 또 다른 피해자들에 대한 책임감도 담겨 있었다.
아이언맨은 항상 성장하는 캐릭터였다. 장난기 어린 무모한 인물 같다가도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내면이 깊어지는 인물이었다. 어린 스파이더맨의 재능을 알아보고 진심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는 어른이자, 자신에게 한없이 냉정했던 과거의 아버지를 이해해 나가고 그의 유산을 새로운 기술 혁신에 적용하는 천재 과학자였다. 때로는 끊임없는 불안에 휩싸여 괴로워하기도 했지만, 앞을 내다보고 항상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연구하는 뛰어난 발명가였다. 부모의 암살자 버키 반즈를 감싸는 캡틴 아메리카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지구를 지키기 위해 내민 그의 손을 다시 잡은 것도 아이언맨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닥터 스트레인지가 타노스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내다본 1400만 605개 경우의 수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단 하나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내던졌다.
1) 아이언맨 (2008)
토니 스타크는 17세에 MIT를 졸업한 천재로 군수업체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최고 경영자다. 국방부와 쉴드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마치 내일은 없는 듯한 아주 여유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어느 날 새로 개발한 제리코 미사일의 시연을 위해 직접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텐링즈라는 무장 테러리스트 집단의 공격을 받고 자기가 만든 폭탄에 치명상을 입게 된다. 세계 평화를 위해 개발된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무기들은 테러리스트 집단의 이익을 위해 남용되고 있었다. 토니는 함께 잡혀온 잉센이라는 의사 덕분에 목숨은 구했지만, 심장에 박힌 폭탄 파편 때문에 전자석을 이식받았다. 제리코 미사일을 만들라는 무장 세력에 협조하는 척, 잉센과 함께 전자석을 대체할 소형 아크 원자로도 만들고 이곳을 탈출하기 위한 강철로봇 마크 1도 제작한다. 하지만 잉센과 함께 탈출할 수 없었다. 토니를 구하기 위해 희생했던 잉센은 죽기 직전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다.
뉴욕으로 돌아온 토니는 돌연 무기 개발 중단 계획을 발표한다. 그리고 첨단 전투용 슈트를 개발하고 직접 평화를 위해 나서야겠다고 다짐한다. 지난 음모의 배후 세력을 응징하고 난 뒤 새로운 슈트 로봇의 등장으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자, 대중들 앞에서 본인의 정체를 밝힌다. ‘I’m Iron Man.’ 잉센의 당부처럼 앞으로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2) 아이언맨 2 (2010)
자신의 신기술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리라 자부했건만, 이를 비웃듯이 이반 반코라는 새로운 적이 등장했다. 설상가상으로 아크 원자로에 자신의 몸을 파괴하는 팔라듐코어 중독현상까지 생겼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토니는 엇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헌신했던 조직, 쉴드의 닉 퓨리를 만난 토니는 아버지의 조언이 담긴 자료를 발견한다.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에너지원을 발견한 기쁨과 더불어, 항상 차갑고 무뚝뚝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토니, 너는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것은 모두 널 위해 만든 거란다. 내 시대의 기술로는 불가능하지만 네 시대엔 가능할 거다. 내가 만든 일생일대 최고의 작품은 바로 너란다.’
3) 어벤져스 (2012)
이제는 하다 하다 외계인과 싸우게 되었다. 아스가르드에서 온 로키라는 녀석이 지구를 지배하겠다고 치타우리 종족을 불러왔다. 어벤져스가 결성되어 이들을 막아보려 했지만, 설상가상으로 뉴욕에는 핵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토니는 아이언맨 슈트를 입고 핵 미사일을 업은 채, 우주 저 멀리 외계 함선에 던져버렸다. 가까스로 지구에 돌아왔다. 죽을 뻔했다.
4) 아이언맨 3 (2013)
뉴욕 사태 이후로 외계인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토니는 밤새 전투용 슈트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테러집단과의 싸움이다. 자신의 은신처와 소중한 사람들까지 위협하는 킬리언 일당과 싸우면서 토니는 슈트에 의존하지 않고도 아이언맨이 되어갔다. 모든 사태가 정리된 후, 토니는 그 동안 만든 슈트를 모두 없애 버렸다. 심장 파편 제거수술도 받았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의존했던 아크 원자로를 떼어 바다에 던져 버린다.
5)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2015)
인류를 지키겠다는 염원을 담아 울트론을 제작했건만, 오히려 스스로 적을 만든 꼴이 되어버렸다. 이에 대적하고자 토르의 도움으로 자비스의 AI를 모태로 한 비전을 만들었다. 모두가 힘을 합쳐 승리했다고 생각했을 때, 소코비아라는 한 국가가 붕괴되어 있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국 피해자가 생겼다.
6)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 (2016)
소코비아에서 아들을 잃은 여자가 토니에게 내 아들의 복수는 누가 해주냐며 따진다. 결국 히어로 활동의 정부규제를 둘러싼 소코비아 협정이 제기되었다. 이를 찬성하는 아이언맨 파와 반대하는 캡틴 아메리카 파가 나누어졌다. 아이언맨은 새로운 멤버로 아직 어린 10대 스파이더맨을 영입했다. 캡틴 아메리카를 좋아하고 첨단 슈트를 선물 받아 신나 하는 스파이더맨을 데려온 건, 캡틴 아메리카와 진짜 싸우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절친 로디가 크게 다치고, 심지어 버키가 자신의 부모님을 죽인 원수였다는 사실을 캡틴이 알고도 숨겼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내 아버지가 슈퍼 솔져를 만들기 위해 평생 연구에 헌신하고 비브라늄 방패도 만들어줬는데 이럴 수가.
7) 스파이더맨: 홈커밍 (2017)
위험한 일에 나서지 말라고 했건만, 이 꼬맹이는 자꾸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아직 갈 길이 먼 아이다. 피터가 제발 슈트를 다시 가져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아버지처럼 말하고 있었다.
‘슈트 없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넌 더욱 슈트를 입을 자격이 없어.’
8)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2018)
어느 날 닥터 스트레인지가 찾아왔다. 타노스라는 보라색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러 온다고 한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확인한 1400만 605개의 미래에서 이길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단 하나. 절대 뺏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인피니티 스톤인데, 이상하게도 닥터 스트레인지는 토니를 구하기 위해 타노스에게 순순히 타임 스톤을 헌납한다. 그리고 지구의 절반이 사라졌다. 내가 아들 같이 생각했던 스파이더맨을 포함해서.
9) 어벤져스: 엔드게임 (2019)
지난 5년간 토니는 사랑하는 아내 페퍼, 딸 모건과 함께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캡틴 아메리카가 찾아와, 지구의 절반을 구하러 가자고 한다. 양자터널을 통해 과거로 가서 인피니티 스톤을 구해온다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다. 모두를 돌려보내고 집에 혼자 있을 때,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놀랍게도 계산해 보니 시간여행은 가능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토니에게 페퍼가 ‘과연 당신이 편히 쉴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던졌다.
토니는 테서렉트가 보관된 1970년 연구소로 잠입했다가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 하워드 스타크는 아내가 임신 몇 개월인지도 모르는 무심한 사람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아내를 위해 예쁜 꽃다발도 준비했다. 아버지는 대의보다 자신의 이익을 좇아 살았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딸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토니에게 예비 부모가 가지는 불안과 궁금증을 우르르 털어놓기도 했다. ‘준비는 잘 되어 있었나요?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있었나요?’ 항상 완벽하고 엄격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이토록 새 아이를 기다리면서 설레고 걱정이 많았다니,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토니는 아버지를 한껏 안아주면서 감사의 말과 격려를 전했다. 짧지만 그렇게 아버지에게 못다 한 말을 남겼다.
토니의 나노기술로 새 인피니티 건틀렛을 만들고 헐크가 지구의 절반을 살렸지만, 2014년 과거의 타노스가 2023년으로 건너왔다. 최후의 전투에서 닥터 스트레인지의 신호를 확인하는 순간, 토니는 아이언맨으로서 모두를 위기에서 구하고 마지막 생을 마쳤다. 그제야 페퍼는 토니를 보내며 ‘이젠 편히 쉬어도 돼’라고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