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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ie Jul 19. 2023

#케빈에 대하여, 해피 이벤트

모성애라는 이름의 감옥

10대 시절 재미있게 본 TV 프로그램 중에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파티시에 주인공이 자신의 사랑을 찾아 우여곡절을 겪는 내용이다. 극 중에서 아직까지 결혼을 못 한 노처녀라고 어머니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는 그녀의 나이 방년 30세였다.


30세라니! 지금의 나보다 어리다.


아마도 그 드라마를 보면서 삼순이보다 일찍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상 나이는 28세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실제 28세의 나는 이제 막 사회생활에 적응해 가는 풋내기였다. 결혼은 내 인생의 우선순위에 없었다. 아직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 사이 우리 사회는 바뀌어 있었다. 이제 더는 서른의 남녀를 노총각, 노처녀라고 부르지 않는다. 삼순이가 놀림당하던 2005년은 30대 인구 5명 중 1명만 미혼이었다면, 2021년은 5명 중 2명~3명이 미혼인 세상이다. 출산율 또한 2005년 1.08명에서 이미 3년 전부터는 1명 미만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2021년 0.86명이라는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 사이 저출산 대책이라는 미명 하에 정부 예산만 100조가 넘게 쓰였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자녀를 키우기 어려운 사회다. 특히나 사회생활을 하는 엄마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듯하다. 주변에서 결혼 이후 출산과 육아를 이유로 본인의 꿈을 접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처럼 희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워킹맘과 전업주부 사이에 우열을 비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녀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는 주 양육자가 아이를 계속 돌볼 수 있는 환경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버지니아 울프가 1929년 「자기만의 방」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여성이 대학 도서관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는 시대가 아니다. 남녀가 동등하게 고등교육을 받고 직업을 갖는 시대에 엄마라는 이유로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면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다큐멘터리와 시사프로그램을 좋아한다. 적어도 사회나 교육에 관한 내용은 관심 있게 보는 편이다. 대부분의 방송은 국내 사례에 대한 비교군을 해외에서 찾았다. 처음에는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점차 사대주의적인 느낌도 들었다. 북유럽은 이렇고요~ 서유럽은 이런데요~ 북미는 이렇죠~ 식의 정형화된 방송을 보다 보니,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많이 뒤처진 것인가 싶기도 했다. 전교 꼴찌가 뒤에서 3등이라도 해보겠다며 연습문제 한 번 풀어볼 생각도 없이 우등생들만 쫓아다니며 그들의 비결을 빽빽하게 받아쓰기만 하는 모습 같다고나 할까.


결혼과 출산, 양육에 관한 논제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부 갈등, 고부 갈등, 장서 갈등, 기타 여러 가족 간의 갈등에 관해서 여전히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소위 쿨하지 못하다. 반면에 서양 사회는 모두 서로 다른 개성도 품어주고 존중해 주는 따뜻한 인격을 지닌 사람들로만 구성된 것처럼 묘사한다. 일종의 착시효과다. 적어도 <케빈에 대하여><해피 이벤트> 같은 영화를 보고 나면, 사람 사는 세상 모두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엄마는 힘들다.

  그런데 아빠와 함께 짐을 나누어질 수 없는 엄마는 더 힘들다.

  그리고 이들은 세계 어디에나 있다.


 <케빈의 대하여>의 에바와 <해피 이벤트>의 바바라는 꿈과 열정이 많은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사랑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뒷이야기는 어떠한 현실이 펼쳐지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분명 사랑은 둘이 했는데, 모든 책임의 화살은 한 명에게만 비수처럼 꽂혔다. 서로의 배우자는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이 화살에 전혀 관심이 없다. 공감받지 못한 이 상처는 계속 에바와 바바라를 갉아먹고 있었다.



Take 1 <케빈에 대하여>


스페인 토마토 축제를 즐기는 젊은 에바의 회상 너머로 온갖 욕설이 들려온다. 화면 가득 채워진 새빨간 이것이 진짜 토마토인지, 내 아들이 죽인 이들의 피인지, 사람들이 살인자의 집에 칠해놓고 간 빨간 페인트인지, 슈퍼마켓 가득히 진열된 토마토 케첩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비난이 오롯이 아들의 엄마인 에바의 몫이라는 것이다.


에바는 자유로운 여행가였다. 사랑하는 프랭클린을 만나 계획에 없던 아들 케빈이 생겼다. 육체의 변화만큼이나 정신적 충격도 컸다. 세계여행에서 영감을 얻고 글을 쓰는 이 즐거움을 당분간 버려야 한다니. 에바는 아직 아들 케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케빈도 엄마가 자신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태어난 순간부터 한 시도 빼놓지 않고 교묘하게 엄마를 괴롭힌다.


처음에는 에바도 케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린 케빈이 발달에 아무 이상이 없는데도 전혀 말을 하지 않고 통제에 따르지 않을 때마다, 에바는 모든 것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아들에게 하나씩 세상의 소통법을 알려주려고 할수록 케빈은 에바의 인내심을 테스트했다. 이윽고 케빈은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방을 대놓고 망가뜨린다. 그 방은 에바가 육아로 펼치지 못한 자신의 여행에 대한 꿈을 담은 소중한 방이었다.


프랭클린은 자상한 남편이다. 항상 아이들과 놀아주는 다정한 아빠다. 아들 케빈이 태어났을 때도, 둘째 딸 실리아가 태어났을 때도 프랭클린은 언제나 아이들의 친구였다. 그런데 그냥 친구였다. 프랭클린은 에바의 고민에 대해 들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착하기만 한 아들이 영악하다니 아내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더군다나 프랭클린은 아내가 양육자로서 충실하기를 원할 뿐, 그녀의 꿈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다.


‘아직 애잖아, 애가 뭘 알겠어, 애가 미안하대. 애가 일부러 그런 짓을 하는 게 말이 돼? 지금 애들을 두고 혼자 에콰도르에 가겠다고?’


영화에서 프랭클린은 항상 웃는 얼굴 위주로 나온다. 아빠는 아이와 놀아주는 모습 외에 제대로 화면에 잡힌 적이 없다. 훈육과 관련한 부부의 대화는 거진 얼굴 없는 대사로만 스쳐간다. 그리고 그때마다 플랭클린은 어린아이가 그럴 리 없다며 에바의 걱정스러운 말을 일축한다.


반려견 훈육의 달인 강형욱 훈련사의 프로그램을 보면, 마음 여린 보호자가 난폭한 강아지에게 단호하게 훈육하지 못할 때마다 강 훈련사가 일침을 가하는 순간이 있다. 프랭클린이 딱 그런 사람이었다. 강아지만 예뻐하고 옳고 그름을 가르칠 줄 모르는 보호자. 그는 방관자였다. 단 한 번이라도 에바의 말을 믿고 아들의 어두운 면을 들여다볼 노력이라도 했었다면, 모든 인물이 이토록 힘들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Take 2 <해피 이벤트>


바바라와 니콜라스는 사랑에 빠졌다. 아이도 갖고 함께 가정을 꾸리기로 한다. 여기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대학원생 바바라는 조교수가 되기 위해 3월까지 논문을 써내야 하는데, 임산부인 그녀는 3월에 출산도 해야 한다. 바바라는 행여 자신에게 불이익이 생길까 선뜻 지도 교수에게 임신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영화감독 지망생 니콜라스는 제2의 쿠엔틴 타란티노를 꿈꾸고 있지만, 현재 비디오 가게에서 일한다. 바바라의 눈에 니콜라스는 그저 이상주의자일 뿐이다. 두 사람이 아기와 함께하기 위해 집은 어떻게 할 것이며, 직업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바바라의 속사포 같은 질문에 니콜라스는 멍하기만 하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둘은 보금자리를 만들고 예쁜 딸 레아도 얻었다.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 니콜라스도 새 직장을 구했다.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 한 사람,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바바라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큰 산을 넘었건만, 그것이 고통의 끝이 아니었다. 바바라는 이제 아름다운 여성이 아니었다. 니콜라스가 첫눈에 반했던 매혹적인 그녀도 아니었다. 아이를 낳으면서 예전과 달라진 몸은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었다. 이미 임산부로 병원에 있을 때부터 자신의 몸은 생물학적 관찰의 대상이지 존엄성이 있는 몸이 아니었다. 딸 레아를 낳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아닌 여성으로서 바바라가 설 자리는 없었다. 훗날 의사에게 신체 어느 기관에 대한 칭찬을 듣자, 바바라는 펑펑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들어보는 자신의 몸에 대한 칭찬이었다. 엄마가 아닌 여성으로서.


분명히 서로 사랑해서 아기를 가졌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레아가 태어난 뒤로 니콜라스는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풀었다. 혼자 독박육아를 해야 하는 바바라의 인내심은 극에 달했다. 니콜라스는 나름의 해결책을 선보였다. 아이 돌보는 것이 힘들다 하니, 본인의 어머니에게 SOS를 쳤다. 바바라는 자신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시어머니를 데려온 니콜라스의 행동에 기가 찰뿐이다. 시어머니가 군말 없이 아이를 돌볼 리가 없다. 시어머니는 집 안 구석구석 자신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 부분을 찾아낼 때마다 잔소리에 잔소리를 거듭한다. 잠시라도 쉬고 싶었던 바바라는 혼자 있을 때보다 더 몸과 마음이 바빠졌다. 뿌듯해하는 니콜라스의 얼굴을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바바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피 이벤트>의 원작 소설은 엘리에트 아베카시스라는 여성작가가 썼다. 하지만 레미 베잔송 감독은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는 미혼 남성이다. 당시 자신의 여자친구와 함께 각색에 참여했다고 한다. 똑같이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한 경험이 없는 남녀가 만든 영화인 셈이다. 우리의 현실도 그렇지 않을까? 태어날 때부터 엄마와 아빠로 만들어진 사람은 없다. 모두가 완벽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가 된다. 안타깝게도 사회에서 아빠가 아이를 돌보는 것은 칭찬받는 일이지만, 엄마가 아이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흔히 아이의 문제는 엄마의 잘못으로 귀결된다. 두 사람의 사랑으로 아이가 태어나듯이, 두 사람의 관심이 있어야 아이도 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부부만이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 유튜브에서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가 저출생에 관한 본인의 소신을 드러낸 바 있었다. 인구감소 문제의 본질은 여성이 자녀를 낳지 않아서 생기는 ‘저출산’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아이를 양육하기 힘든 환경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저출생’에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임신과 출산을 제외하고는 남녀가 모든 양육을 함께 할 수 있다면서 자신의 일화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최 교수는 어린 아들을 자신의 강의에 세 번 정도 데려온 적이 있었는데, 그중 딱 한 번 아이가 화장실이 급하다고 해서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리를 비운 적이 있었다고 한다. 3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여러 학생들이 강의평가에 그 일을 문제 삼았다고 한다. 그때 그 명문대 학생들은 지금쯤 누군가의 부모가 되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 당시 따가운 시선만큼이나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를 바라보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우리 모두 한 때 작은 아이였고, 지금처럼 성장하기까지 많은 어른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디 모두가 잊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시작은 자녀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의논해 가는 젊은 부부의 연대로부터 차곡차곡 쌓아지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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