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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ie Jul 19. 2023

#라라랜드, 미드나잇 인 파리

당신의 꿈은 여전히 안녕하신가요?

중학생 때 장래희망은 외교관이었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영어발음을 따라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외국어에도 흥미가 많아졌다. 그리고 늘 해외생활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국제’라는 말이 들어가는 모든 영역에 관심이 많았다. 해외 출장이 잦고 외국어를 활용하는 직업은 많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그중에서도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외교관이 가장 명예롭고 멋있는 직업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상과 달리, 현실적인 사항은 고려하지 않은 ‘꿈’이었다.


대학생이 되면 꼭 교환학생을 가고 싶었다. 먼저 떠난 친구들이 고향에 대한 향수병을 이야기할 때마다, 오히려 떠나 있는 그들이 더 부러웠다. 주변에서 지인들이 유럽 여행을 동네 마실 다녀온 듯이 자세히 설명해 줄 때마다 나의 결심은 더욱더 굳건해졌다. 그런데 카자흐스탄에서 여름학기 교환학생을 짧게 경험하고 난 뒤, 해외 체류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1) 음식: 현지 요리를 먹은 첫날부터 배탈이 났다. 함께 먹은 현지 학생들은 멀쩡했지만 나와 한국 학생들만 배가 아팠다. 그 뒤로도 음식 복불복은 계속되었다. 가장 맛있었던 음식은 알마티 호수 근처에서 멋진 풍경과 함께 먹었던 양고기 샤슬릭이었다. 하지만 그 냄새는 참기 힘들었다. 한식이 정말 그리웠다. 귀국하자마자 엄마표 된장찌개를 먹고 나서야 살 것 같았다.


2) 언어: 준비가 미흡했던 부분은 후회가 됐다. 충분한 기본기 없이 실전에서 저절로 영어 실력이 향상되지는 않았다. 별것 아닌 쌉소리까지 유창하게 영어로 말하는 다국적 학생들 앞에서 분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성과 없이 귀국할 수는 없었다. 더 좋은 표현을 하기 위해 더 뾰족한 생각을 해야 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발표를 자원했다. 주제는 한국의 광고시장 동향으로 선택했다. 당시 모든 광고 모델은 김연아 선수 아니면 원빈이었다. 할 말이 명확해지고 나서야 언어는 부수적인 도구가 될 수 있었다.


3) 사고: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문화적 배경마저 다른 사람의 생각은 더 어려웠다.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과 친해지고 함께 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글로벌 학생들의 자유로운 사고방식은 한국인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으로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이 아닌가. 그 경계는 참 애매했다. 다름을 포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지금의 나는 외교관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관심의 방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외교관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 않을 뿐이다. 처음 막연히 장래희망을 생각하던 그때 그 느낌 그대로 다르게 산다. 해외 출장 대신 해외여행을 가고, 외국어 관련 업무 대신 취미로 외국어 공부를 한다. 물론 다양한 외국어를 능수능란하게 하는 내 모습은 아직도 로망이다. 그러나 그 모습이 꼭 외교관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외국어가 되면 되는대로, 안 되면 안 되는대로 물이 흘러가듯이 편하게 즐기려고 한다. 꿈을 취미로 전환한 셈이다.


세상의 이치를 알아갈수록 꿈의 삼위일체는 어렵다.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 현실 가능한 것의 조화는 쉽지 않다. 때로는 세 가지에 대한 내 안의 정의마저 모호하거나 확신이 서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반드시 선택의 순간이 온다. 여기서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면 오롯이 나의 의지대로 결정하기가 더욱 어려울 수 있다.



Take 1 <라라랜드>


  배우 지망생인 미아는 촬영 스튜디오 근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손님이 실수로 쏟은 커피 묻은 셔츠마저 갈아입지도 못하고, 시간을 쪼개어 오디션을 본다. 매번 오디션에 탈락하지만, 카페에 오는 유명 배우들의 기운을 받으며 항상 꿈을 잃지 않는다. 미아는 어느 날 세바스찬의 열정적인 재즈 연주곡을 듣고 홀리듯이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피아니스트 세바스찬은 자신만의 재즈바를 열어 독창적인 재즈를 연주하는 것이 꿈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의 재즈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피고용인 신분에서 세바스찬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용주가 원하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뿐이다. 미아와 미래를 약속하고 난 뒤, 점점 더 돈이 필요해졌다. 안정된 수입을 위해 음악성향이 완전히 다른 밴드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결국 미아와 세바스찬은 서로의 가치관 차이로 갈등을 겪는다. 미아는 자신이 알던 세바스찬이 더는 재즈에 대한 열정이 없고 꿈을 상실한 사람이라며 실망한다. 밴드 일에 밀려 미아의 1인극 도전을 응원하는데 뒷전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반면 세바스찬은 현실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상업음악계와 먼저 손을 잡더라도 고정수입을 확보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수단과 목적은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가? 아니면 목적을 위해서 수단은 잠시 달라져도 괜찮은가? 재즈를 향해 이상을 품은 사람은 항상 재즈만 해야 하는가? 꿈보다 현실이 우선이라면 잠시 재즈를 접어도 되는가? 그렇다면 영원히 재즈를 할 자격이 사라지는 것일까? 미아도 맞고 세바스찬도 맞다. 누구 하나 틀리지 않았다. 단지 그때 그 시점에 서로의 우선순위가 달랐을 뿐이다. 그리고 하필 그것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는 점을 빼고는 말이다.


미아는 세바스찬보다 재즈에 대한 세바스찬의 열정을 더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아는 세바스찬이 밴드 공연을 하더라도 그 음악이 좋아하는 일이었기를 바랐다. 미아가 자비로 극장까지 대관하며 1인극을 준비했던 배경에는 꿈에 대한 세바스찬의 진심 어린 조언이 있었다. 배우인 이모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연기하며 자작극을 만들던 그 모습. 미아가 겸연쩍은 미소를 보이며 별것 아니었다는 듯 말했던 작은 기억에서 오디션 대신 루이 암스트롱처럼 직접 극을 써서 역사를 만들어보라고 응원하던 사람이 세바스찬이었다.


 하지만 세바스찬은 함께하는 미아와의 행복을 위해 현실과 타협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인물이었다. 세바스찬의 관점에서 보자면, 상업밴드 합류는 엄청난 희생이었다. (물론 미아는 권유한 적이 없다.) 자존심이 강한 세바스찬은 피고용인 신분으로 원하지 않는 곡을 연주해야 하는 상황이면 말끝마다 언제나 자신이 동의했고, 자신이 허락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재즈 스타 호기 카마이클이 앉던 의자를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비록 한번 사기당했을지라도 꼭 언젠가 자신의 재즈바를 열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다. 미아와 어머니의 통화를 엿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론 그 선택으로 정작 재즈와 미아를 멀리하게 되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영화는 해피엔딩일 것만 같았던 초반의 설렘을 뒤로하고 각자의 가치관을 지켰던 두 인물의 서로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의 방식으로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했다. 단지 더는 함께 하지 않을 뿐이다. ‘만약 그때 그 시점에 서로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모습이었겠지.’라는 아쉬움을 짧은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하고 싶은 일이 당장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고 해서 조급해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라라랜드>의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무명시절에 구상한 이 영화의 제작 투자를 받기 위해, 먼저 만든 영화가 <위플래쉬>였다고 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애덤 그랜트의 『오리지널스』 책에는 하고 싶은 일의 성과가 본업을 뛰어넘어야 그때부터 전업으로 매진했다는 사례가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룹 퀸의 브라이언 메이, 그래미상 수상자 존 레전드, 소설가 스티븐 킹, 이베이 창업자 피에르 오미디야르 같은 인물이 모두 그러했다.


미아가 세바스찬의 도움으로 마지막 오디션을 무사히 마치던 날,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않고 헤어졌다. 여전히 사랑하는 감정은 남겨둔 채. 생각이 많아지는 장면이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감정을 느끼는 진짜 대상은 무엇일까? 특정한 존재 그 자체인가? 아니면 그 사람이 지닌 특별한 재능이나 비전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상대와 상관없이, 단지 사랑에 빠진 그 당시 나의 상태를 사랑하는 것인가? 모든 질문을 완벽히 답할 수는 없지만, 세바스찬이 상업밴드에 합류하면서 미아에게 자신의 재즈바 설립에 대한 계획을 다시 한번 이야기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더라면 둘은 헤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 마음먹은 대로 하고 싶은 일이 풀리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다 잘될 것이다.



Take 2 <미드나잇 인 파리>


꿈을 펼치기 위해 생계 유지부터 걱정했던 <라라랜드>의 미아, 세바스찬과 달리,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 펜더는 이미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성공한 헐리웃 극작가이자, 부유한 집안의 약혼녀 이네즈와 말리부에서 신혼을 계획하는 예비신랑이다. 그러나 최근 자신의 전문 영역을 벗어나 순수문학 분야에 도전하고자 소설을 기획하고 있다. 대중의 눈높이에 따라가는 상업적인 글 말고 진짜 내 마음이 원하는 글을 쓰고 싶다. 이네즈의 부모님을 만나러 온 이번 파리 방문에서 더욱 마음이 굳건해졌다. 1920년대 파리를 선망하며, 영원히 파리에 정착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그 시절을 느낄 수 있게.


약혼녀 이네즈는 길의 행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미 헐리웃에서 글을 쓰면서 인정받고 있는데, 굳이 돈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소설만 쓰겠다는 고집은 알 수 없다. 여기에 옛날 파리 감성에 빠져서 비 오는 날도 우산 없이 걷기 좋은 도시라는 둥, 길의 끝나지 않는 파리 찬양은 공감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편하고 풍족한 말리부 대신 파리라니? 예비장인, 장모의 눈에도 앞으로 결혼을 앞둔 예비 사위의 자질이 의심스럽다. 과연 경제력이 있는 건지, 혹시나 파리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닌가? 이네즈의 말로는 요즘 들어 길이 밤마다 사라진다는데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급기야 이네즈의 아버지는 사설탐정까지 붙였다.


길은 우연히 1920년대 파리로 떠나는 자동차를 타게 되었다. 항상 남겨진 예술 작품들로만 동경하던 1920년대 예술가들을 만나다니! 스콧 피츠제럴드, 어거스트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 콜 포터, 살바도르 달리 등등 이름만 들어도 설렜던 길은 한순간에 성덕이 되었다. 여기에 거장들이 자신의 소설을 관심 있어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뮤즈 아드리아나까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니 이것은 운명인가?


하지만 영원히 과거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또 다른 시대에 대한 갈망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자신이 1920년대 파리를 동경하듯이, 아드리아나도 1890년대 벨 에포크 시대를 선망했다. 그녀도 당대 예술가 폴 고갱, 에드가 드가와 함께 과거에 머무르고 싶어 했다. 정작 그들은 르네상스 시대를 그리워한다. 이제야 길은 깨달았다. 인간은 끊임없이 과거의 라라랜드로 도피처를 만든다는 것을. 삶은 언제나 모두에게 불만족스럽다. 길은 일도, 사랑도 현재의 나에게 집중하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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