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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ie Jul 19. 2023

#비포 선라이즈(트롤로지)

하루 종일 쏟아내는 수다의 힘,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이 책의 표지와 날개에는 아주 작은 비밀이 숨어 있다. 바로 지난 2019년에 떠난 동유럽 여행에서 <비포 선라이즈>의 실제 장소를 찾아가며 찍었던 사진 속 배경이다. 단 하루의 사랑을 잠시도 쉬지 않고 속삭이던 20대의 제시와 셀린이 걸어 다닌 오스트리아 빈은 곳곳이 아름다운 도시였다. 영화에 관한 내용을 담는 첫 에세이에 꼭 담고 싶었다. ‘작가의 말’과 함께 실린 날개의 사진은 두 남녀가 함께 LP 음악을 들으며 미묘한 설렘을 주고받았던 ALT&NEU 레코드 샵의 간판, 책의 표지는 알베르티나 미술관 광장에서 대화를 나누던 주인공들의 뒤로 멋진 야경을 뽐내던 오스트리아 빈 국립 오페라극장의 전경이다.


이 야경 사진에도 뒷이야기가 있다. 이곳에서 밤에 꼭 인생 사진을 찍겠다며 돌진하다가 발아래 하나 더 있는 계단을 보지 못했다. 결국 그대로 바닥에 대(大) 자로 엎어져서 무릎이 심하게 까지고야 말았다. 당시에는 아픈 것보다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고 웃겨서 계속 웃음이 났다. 함께 갔던 동생은 나의 소원대로 인생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웃음보가 터진 나의 웃긴 모습을 오페라극장의 반짝이는 야경과 함께 연속 촬영해 주었다. 이렇게 유럽에서도 새로운 흑역사가 만들어졌다. 웃음도 잠시, 영어가 통하는 직원이 있는 약국을 찾아 헤매느라 힘들었다. 다음 여행지로 연이어 체코와 이태리 북부도 가야 했는데 한동안 접히지 않는 아픈 다리를 통째로 끌고 다니느라 너무 아팠다. 낭만은 짧고 고통은 길었다. <비포 선라이즈><비포 선셋><비포 미드나잇> 비포 트릴로지 속 남녀의 사랑은 짧고 기다림은 길었던 것처럼.


제시와 셀린의 20대, 30대, 40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비포 시리즈는 각 영화에서 담는 시간이 두 사람 인생의 딱 하루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하루에서 나머지 9년만큼의 사랑을 읽을 수 있다.



20대의 남녀 <비포 선라이즈>

미국 남자 제시와 프랑스 여자 셀린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났다. 저돌적인 제시의 제안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하루를 보내며, 두 사람은 다양한 대화를 나누었다. 학업, 진로, 꿈, 연애, 삶, 죽음, 가족 등 청춘의 질문을 서로 주고받으며 사랑에 빠졌고, 6개월 뒤 같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어느새 두 사람이 없는 빈의 풍경만이 남았다.


30대의 남녀 <비포 선셋>

  9년 뒤, 프랑스 파리에서 두 사람은 재회했다. 제시는 유부남이고 셀린과의 로맨스를 바탕으로 책을 낸 작가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과거의 그날 약속장소에서 만나지 못했다. 흘러간 인연인 듯 무심하고 덤덤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남녀는 결국 9년 전 그날이 자신들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았던 일생의 로맨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40대의 남녀 <비포 미드나잇>

첫 만남 이후 18년 뒤, 그리스 남부에서 휴가를 즐기는 두 사람은 쌍둥이 딸을 키우는 부부가 되었다. 제시는 9년 전 재회를 계기로 이혼했다. 친아들과 미국에서 더 가깝게 지내고 싶은 제시와 모든 삶의 터전이 프랑스에 있는 셀린은 충돌한다. 점점 갈등은 걷잡을 수 없다.


매번 좋아하는 영화가 바뀌었던 나도 <비포 선라이즈>만큼은 수없이 반복해서 봤다. 주로 범죄, 액션,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는 취향이지만, 앞으로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에서 <비포 선라이즈>를 빼놓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 영화는 주로 멜로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원픽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 펼치는 로맨스보다 밤새도록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다양하게 이야기해 가는 그 과정이 더 인상 깊었다. 둘의 대화를 곱씹다 보면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적인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영화 초반 마주 앉은 기차 안에서 제시가 셀린에게 자신이 제작하고 싶은 TV쇼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있다. 1년 365일 24시간 내내 전 세계 사람들의 일상을 생중계하는 가상의 TV쇼에 대해, 셀린은 그렇게 지루한 일상을 누가 보겠냐며 비웃었다. 그런데 지금 시대의 미디어 트렌드를 생각해 보면 제시의 상상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수년간 유튜브의 달라진 위상과 더불어, 브이로그, ASMR, 실시간 라이브 방송을 매개로 소소한 개인화 콘텐츠가 부상해 온 과정이 바로 제시가 꿈꾸던 TV쇼 모습이 아니었을까?


제시는 이 가상의 프로그램을 ‘일상의 시’ 같은 느낌으로 떠올렸다면서 오로지 전 세계에 동시 배급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90년대에 이만큼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더욱 긴밀하게 퍼질 줄 미리 알았더라면? 벌써 대유행을 선도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10년 전에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북유럽 어느 지역에서 배가 해안을 떠다니는 영상을 장시간 보여주는 방송이 현지에서 인기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2009년 노르웨이 공영방송 NRK에서 방송한 슬로TV는 기차 밖 풍경만 7시간 방영하였는데 시청률 15%가 나왔다고 한다. 동시간대 다른 방송의 시청률은 4%였다.) 도대체 그런 프로그램을 왜 보는지 당시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불멍이니, 물멍이니 하는 활동들이 꾸준히 인기 있었던 광경을 떠올려보면, 결국 여유를 찾고 싶은 마음은 시대를 아우르는 현대인의 본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느린 감성은 곧 비포 시리즈의 매력이기도 하다.


비포 트릴로지에는 극적인 사건이 없다. 물론 시리즈 중간의 맥락으로 미루어 제시가 셀린에게 다시 오기까지 험난한 과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각 영화 안에서 사건보다 대화 위주로 전개가 흘러간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리고 둘의 이야기는 항상 어디로 주제가 튈지 모른다. 특히 서로를 알아가던 <비포 선라이즈>에서 그 톡톡 튀는 매력이 극에 달했다. 그토록 다시 보아도 대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늘 볼 때마다 새롭다.


나머지 두 작품은 관람 전 약간의 심호흡이 필요하다. <비포 선셋>은 이미 가정이 있는 제시가 셀린에게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불륜의 현장을 남몰래 지켜보는 듯해서 불편한 느낌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비포 미드나잇>은 이미 18년이나 훌쩍 지나버린 세월만큼 늙고 지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비포 선라이즈>의 감동마저 지워버릴까 두려웠다. 한 동안 볼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부부는 전우와 같다는 시쳇말처럼, 사랑의 결실을 맺은 제시와 셀린의 미래도 다르지 않았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두 청춘의 예쁜 클로즈업으로 사랑에 빠지는 남녀의 표정을 많이 담았던 것과 달리, <비포 미드나잇>에서는 체감상 부부의 모습이 점점 주변의 배경 속으로 묻혀가는 느낌이다. 이제 형이상학적인 대화를 주고받던 어린 남녀는 없다. 대신 치열하게 토론하며 부부의 삶을 채워가는 과정이 힘들어질 때마다 마법의 주문처럼 제시와 셀린은 그날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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