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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ie Jul 19. 2023

#우리도 사랑일까

예쁜 포장지가 말해주지 않는 선물의 진실

온라인 쇼핑을 할 때는 택배를 기다릴 때가 가장 신난다. 고심 끝에 사고 싶은 물건을 고르고 골라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를 누르고 언제쯤 배송이 오겠거니 상상하는 그 순간이, 막상 택배가 와서 포장을 열고 택배 상자를 정리하는 귀찮은 순간보다 더 좋다. 상자를 열기 싫어서 며칠째 그냥 두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토록 갖고 싶던 것도 수중에 들어오고 나면 더는 기대할 것이 없어서일까? 새로움의 효용이 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얼마 전 택배실에 내 앞으로 가로 50cm X 세로 20cm X 높이 15cm 정도 되는 종이박스가 왔다. 내가 무엇을 시켰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샀을 법한 물건 중에 이 정도 상자에 들어갈 만한 물건이 뭐가 있었을까? 아마도 며칠 전 사무용 무선 키보드를 사서 키보드 덮개를 주문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큰 박스가 오다니, 순간 내가 키보드 덮개가 아닌 키보드를 또 주문했나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박스에 둘러진 테이프를 뜯어내고 안을 열자, 두 번 접으면 손바닥 하나로도 가려질 듯한 아주 얇은 키보드 덮개가 있었다. 나는 실수하지 않았다. 다만 과잉포장이 너무 심해서 종이가 아깝다는 불만과 더불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키보드 덮개 말고도 깜짝 사은품이라도 있었나 기대했던 나의 옹졸한 마음이 조금 부끄러웠을 뿐이다. 간혹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으레 선물이 담긴 종이백의 크기나 포장의 모양새로 어떤 선물이 담겨있을지 실제 선물과는 상관없는 지나친 기대를 하곤 했던 것 같다.


정작 내가 필요해서 주문한 택배는 열어보기도 귀찮을 때가 자주 있는데, 예상치 못하게 받는 선물에는 예쁜 포장지만 봐도 왜 이렇게 혼자 설레고 기대하게 되는 것일까?


<우리도 사랑일까>의 주인공 마고는 유부녀다. 남편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며, 때때로 의뢰받은 글을 쓰는 프리랜서다. 남편 루는 닭 요리에 관한 책을 준비하는 작가다. 글을 쓰기 위해 집에서 항상 닭 요리를 한다. 부부는 아주 사이가 좋다. 대화의 99%가 농담이다. 남들이 들으면 다소 엽기적일 것 같은 독특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항상 장난을 친다. 부부는 언제나 사랑이 넘치고 두 사람의 대화에는 늘 웃음꽃이 핀다. 그래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다. 부부는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진.짜. 대화를 하지 않는다.


마고는 캐나다 공원협회의 홍보자료를 쓰기 위해 떠났던 출장에서 묘하게 기분 나쁜 남자 대니얼을 만났다. 대니얼은 사사건건 마고의 불편한 구석을 긁었다. 간통범을 처벌하는 공개심판 연극에서 원치 않게 채찍 휘두르는 관객이 되었던 순간에도, 비행기 탑승 때 멀쩡한 다리로 휠체어를 타고 들어온 사실을 몰래 들킨 순간에도, 책을 읽는 척 옆에서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들통난 순간에도 대니얼은 마고의 마음을 꿰뚫는 듯한 말을 툭툭 던지는 불편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못 본 척할 수 없는 동네 이웃이었다.


마고는 대니얼이 불편했지만, 그가 던지는 질문까지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5년째 함께 사는 남편보다 만난 지 몇 시간 되지 않은 낯선 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시시콜콜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니얼이 다리도 아프지 않으면서 왜 휠체어를 타고 들어왔냐고 묻자, 마고는 자신의 비행기 환승 공포증에 관해 이야기했다.


‘항상 길을 잃을까 두려워요. 비행기를 놓치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비행기를 놓칠까 봐 걱정하는 건 싫어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감정이 두려워요.’


마고는 불확실함에 대한 불확실한 감정이 주는 공포가 싫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필요 이상의 호기심을 갖는 대니얼에게 유부녀임을 분명히 밝혀두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함 속에 혹여 자신이 기대하는 사랑이 있는 것은 아닐지 끊임없이 돌을 던지고 있었다. 대니얼의 관심이 부담스러우면서도 그 대상이 되고 싶었다. 사이좋은 동네 이웃, 썸 타는 외간 남자 그 사이의 어디쯤에서 대니얼의 위치를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다. 차라리 이 모든 선택을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대신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최소한 본인만의 의지로 남편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 마고는 대니얼에게 우리가 30년 뒤에 만나면 그때는 나도 오랜 세월 가정에 충실했으니까 작은 일탈 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냐며 노년의 재회를 제안한다.


대니얼은 처음 마고를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좋았다. 유부녀라는 것을 알고 아쉬워했지만, 그렇다고 선을 넘은 적도 없었다. 마고가 한 발짝 다가오면 자신도 한 발짝 다가섰고, 마고가 물러나면 자신도 물러났다. 그것이 전부였다. 맞은편에 사는 친절한 이웃사촌으로 관계가 정리되었을 때도 모든 것을 시작한 것은 마고였다. 대니얼을 먼저 쳐다본 것도 마고였고, 언제 커피나 마시자는 예의상 인사를 먼저 건넨 것도 마고였다. 마고 부부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고, 마고의 남편 루도 그녀에게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도 안다. 마고를 좋아하지만, 대니얼 또한 불확실한 상황에 끼어있는 것이 싫었다. 대니얼과 마고는 단지 속마음을 몇 차례 터놓고 얘기한 사이에 불과하다. 마고가 남편에 대한 죄책감으로 슬퍼하는 것이 싫었다. 이 동네에 사는 한 이렇게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리라는 것도 싫었다. 대니얼은 마고가 얘기했던 2040년 8월 5일 오후 2시 약속을 적은 루이스버그 등대 엽서를 우편함에 넣어둔 채 떠나버렸다.


마고는 왜 대니얼에게 흔들렸을까? 마고 부부의 관계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부부는 5주년 결혼기념일에 매년 방문하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식기가 오가는 소리 외에 둘의 테이블은 조용하다. 마고가 루에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며 내가 요새 어떤지 물어보든지라고 운을 띄우자, 루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다 알고 있는데 더 할 이야기가 있냐며 대화의 불씨를 서둘러 끈다. 남편을 바라보는 마고의 눈빛이 참 슬프다. 그녀는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가 보는 마고는 항상 집에서 일하는 자신을 괴롭히는 말썽꾸러기다. 그런데 왜 마고가 루를 방해하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늘 같은 곳에서 함께 밥을 먹고, 같이 생활하며, 모든 루틴이 정해진 부부의 일상. 그리고 둘 다 글을 쓴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루는 좋아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지만, 마고는 좋아하는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다. 직업에 관한 대니얼의 질문에 마고는 글을 쓰고 싶지만 원하는 글은 쓰지 못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바로 옆에서 매 순간 펼치고 있는 남편을 볼 때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아내도 자신처럼 좋아하는 글을 쓰는 전업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루는 알았을까? 부부는 일상 외의 다른 주제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고가 남편이 닭요리를 만드는 동안 혼자 외로웠다고 하니, 루는 개를 기를까 제안한다. 마고가 애완견을 기르는 부부들이 아기를 갖게 되는 사례를 언급하자, 루는 다시 대화의 싹을 자른다. 부부가 자녀 계획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둘 중 누군가가 아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중요한 사실은 부부의 대화에 영양가가 없다는 것이다.


대니얼은 아무도 몰랐던 마고의 허전한 마음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고를 닮은 여자를 그리면서 한쪽은 밝고 한쪽은 어두운 양면의 인간을 그렸다. 대니얼이 보는 마고는 정서가 불안한 사람이다. 자신도 자신의 상태를 모르는 정서불안. 마고는 가끔 이유 없이 아기처럼 울고 싶을 때가 있다면서, 이를 살아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겪는 상태에 비유한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의 대화를 정작 온종일 함께 있는 남편과는 할 수 없다. 대니얼이 갑자기 떠나고 난 뒤, 마고는 불안해졌다. 30년 뒤에나 만나자던 약속을 단 하루도 지킬 수 없었다. 마고는 남편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사랑을 찾아 떠났다.


마고는 그 뒤로 행복해졌을까?

대니얼은 마고의 진짜 사랑이었을까?

마고가 기대했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도 사랑일까>의 원제는 'Take This Waltz'다. 사라 폴리 감독이 레오나드 코헨이 부른 동명의 노래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이 노래의 뮤지컬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다시 만난 마고와 대니얼의 열정적인 모습을 배경으로 ‘Take This Waltz’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노래가 끝날 때쯤 소파에 함께 앉아 TV를 보고 있는 마고와 대니얼의 사이에는 오로지 숨 막힐 듯한 적막이 감돌뿐이다. 화려한 댄스 무대가 끝난 남녀는 대화가 없다. 마고의 모든 것이 궁금했던 남자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는 이제 마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전혀 궁금하지 않다. 마고가 하는 요리를 먹지만, 요리하는 마고에게는 관심이 없다. 마고가 사랑한다 말하면 타이밍을 놓치고 한 박자 늦게 원하는 대답을 못 이기는 척 들려준다. 마고가 좋아하는 농담도, 장난도 이 남자는 흥미가 없다. 겉보기에 한없이 매력적이었던 이 남자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이제야 알았다.


전남편 루도 무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다정한 사람이기도 했다. 루는 매일 같이 지루한 닭 요리를 만들었지만, 오븐의 뜨거운 온도에 행여 마고가 다칠까 봐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항상 보호했다. 마고가 사랑한다 말하면 0.5초 만에 사랑한다 응답했다. 마고가 이상한 농담으로 내기를 걸면 바로바로 응수했다. 그리고 매일 같이 마고가 샤워할 때마다 온수기가 고장 난 척 몰래 찬물을 부었다. 수십 년이 흘러 그동안 내가 했던 장난이었다고 고백할 생각이었다. 할머니가 된 아내가 사실을 알고 박장대소할 모습만을 상상하면서. 남편과 헤어지던 날, 그의 비밀을 알게 된 마고는 웃음 대신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남편의 사랑을 뒤로하고 선택한 것이 대니얼이었다.


마고는 영화 초반 대니얼과 함께 탔던 놀이기구를 마지막 장면에서 혼자 탄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미묘한 표정으로 놀이기구를 탄다. 센터 아일랜드의 스크램블러는 신나는 음악과 함께 어두운 배경에서 빙글빙글 도는 놀이기구다. 그때마다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흘러나온다. 같은 노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비디오(새로운 사랑)는 정말 라디오 스타(오래된 사랑)를 죽였을까? 너무 빠르게 움직여서 안전바에 몸을 기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크램블러에서 대니얼과 나누던 눈빛이 사랑인가 싶었다.  그러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는 섣부른 예상이었다. 비디오와 라디오의 매력은 다르다. 비디오가 라디오를 대체하기보다는 영향력은 달라졌을지라도 공존하고 있다. 비디오 중에서도 지상파 TV를 대신해 종합편성, 유튜브, OTT, 제3의 영상매체가 꾸준히 등장하듯이 새것도 다시 오래된 것이 된다. 새것의 새로움이 영원할 수 없듯이, 새 사랑의 설렘은 다시 일상이 되고 권태는 반복된다.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본질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예쁜 포장지가 그 안에 담긴 선물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듯이 말이다. 내가 상대에게 보이는 모습, 상대가 나에게 보이는 모습 모두 마찬가지다.


마고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 이혼하는 용기를 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바꾸지는 못했다. 남편을 떠나면서 어떠한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유추해 볼 수 있는 점은 마고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타인의 사랑에 기대는 행동 외에 자신의 상태를 돌보는 노력이 없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글을 쓰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과 내면의 대화를 나누고 싶은 그녀의 갈증은 여전하다. 이혼 후 처음으로 남편을 마주하게 된 마고의 표정은 미묘하다. 어쩌면 지난 결혼기념일에 있었던 테이블 대화에서 마고가 루와 싸우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 명확하게 의사표명을 했더라면, 부부는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초반 수영장에서 마고 일행이 새로운 것에 마음이 끌린다는 대화를 주고받을 때, 근처에 있던 할머니가 ‘새것도 헌 것이 된다오, 오래된 것들처럼’이라고 응수하는 장면이 있다. 중요하지 않은 듯 슬쩍 등장하자마자 사라지는 이 대사는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설렘은 다시 일상이 되고 권태는 반복된다.

New things get old, just like the old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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