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호석 Feb 12. 2022

아버지에게도 눈물이 있었다

이방인 異邦人 다이어리-1

내가 어렸을 적 할머니는 아버지를 임신하셨을 때 꾸었던 태몽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셨다. 마치 연극배우가 연기하듯 팔을 들어 올리시고 놀라는 얼굴 표정을 지으며 꿈 이야기를 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할머니의 꿈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가을날 추수한 고추를 말리기 위해 지붕 위에 널어놓았는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세게 불어와 그 고추들이 춤을 추듯 하늘 가득 날아올랐다'는 것. 내가 들어본 태몽 이야기 중에 할머니가 꾸신 아버지 태몽처럼 딱 들어맞는 꿈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우선 고추 꿈을 꾸셨는데 아들인 아버지가 태어나신 게 그렇다. 당시 할아버지는 아들을 무척이나 기다리셨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종손인 할아버지는 3대 독자이신 데다 아버지 위 형제로는 누이만 세 분이 있었다. 더구나 할아버지는 주 씨 가문의 시조이자 성리학을 집대성하신 주자 朱子선생의 26대 후손으로서 유교사상을 철저히 신봉하시는 분이셨다. 그런 상황에서 할머니가 고추 꿈을 꾸고 첫아들을 얻으신 것이다. 


할머니의 태몽이 잘 들어맞았다고 생각하는 두 번째 이유는 아버지의 성정이 꿈속에서 회오리바람이 불어 빨간 고추가 춤추듯 하늘 가득 날아오른 장면을 그대로 닮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성정은 한마디로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다. 급하시고 화를 속에 담아두질 못 하신다. 직설적이고 늘 부산하시다. 아버지가 그 불같은 성정을 참지 못하고 폭발시킬 때면 으레 할머니는 나한테 아버지 태몽이야기를 들려주시고는 했다. 그런 태몽을 꾸어서 아버지가 저렇게 불같은 성격을 타고났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그런 성정을 타고나신 데다 젊어서부터 할아버지를 제외한 어느 누구로부터도 간섭이나 속박을 받아본 적이 없으셨다. 또 머슴을 여럿 거느리며 부자 소리를 듣고 사셨기에 늘 거침이 없고 자신감이 넘쳐났었다. 늘 자유분방하고 호탕하고 쾌활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어느 상황에서도 슬퍼하거나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다. 


그런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인해 어쩌다 자식들이 살고 있는 서울에 오셔도 이틀 이상 머물지를 못하셨다. 폐쇄적인 공간인 아파트에 머무시는 것이 마치 감옥에라도 갇히신 듯 답답해하시고 힘들어하셨기 때문이다. 낙상으로 골절이 되어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셨을 때도 통증보다 병실에 누워계시는 게 답답하여 무척 고생을 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는 또 자식을 포함해 어느 누구한테도 어느 것 하나 의지하려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 아버지를 자식들이 모시고자 했지만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셨다. 도회지가 싫고 자식들한테 의지하는 게 싫어서 아버지가 평생 살아오신 시골집에서 혼자 지내시기를 고집하셨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그런 아버지와 예정보다 일찍 마지막 이별을 해야만 했다. 원래는 가족 모두 캐나다에 랜딩하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2년간 기러기 생활을 할 계획이었다. 2년 동안이라도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뵐 수 있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당초 계획보다 훨씬 일찍 기러기 생활을 마감하고 캐나다로 떠나게 되었다. 아버지와의 이별도 그만큼 빨라졌다.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 있는 아내와 자식들한테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가 모두 끝났다. 가방 몇 개 들고 몸만 떠나면 되는 홀가분한 상황이었다. 마음이 홀가분할 뿐 아니라 아내와 지식들과 재회한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다. 오히려 내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작별인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캐나다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었고 가장 힘든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한테 하루라도 늦게 작별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비행기 타기 바로 전 날 아버지가 계시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몇 시간 동안 '이게 생전의 아버지를 뵙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하는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미 연세가 80을 넘어 연로하신 데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점점 기력을 잃어가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를 두고 내가 이민을 가게 되어 자식으로서 너무나 큰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는 죄의식이 내 마음을 괴롭혔다.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객지 생활을 하면서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고향을 찾아가곤 했지만 고향 가는 마음이 그날처럼 착잡하고 무겁고 우울했던 적이 일찍이 없었다.


고향집에 도착하니 아버지 혼자 계셨다. 썰렁하고 적막감이 흐르는 집에 홀로 계신 아버지가 그날따라 너무나 쓸쓸해 보이셨다. 늦가을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마지막 잎새보다도 더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에 혈기왕성하시던 아버지의 젊은 시절 모습이 오버랩되었다가 지워지고는 했다. 이웃 사람들이 챙겨드리기도 하고 누이가 자주 들려서 보살펴 드리기는 하지만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는 것 같았다. 마루에 앉아 계신 아버지가 원래도 마른 몸이셨지만 그날따라 너무나 야위어 보였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마주하고 앉아 있는 내 마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아버지한테 뭔가 해드리고 싶은 얘기가 많을 것 같았는데 말문이 열리질 않았다. 아버지 역시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아들이 먼 나라로 이민을 떠난다는 생각에 아버지 마음도 나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부자간에 흐르던 침묵을 깨고 내가 아버지께 나지막이 작별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이민 가더라도 시간 내서 가끔 찾아뵙겠습니다'라고. 기약 없는 약속이라는 걸 잘 알지만 그 말 외에 달리 드릴 말씀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자식의 작별 인사에 아버지는 힘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더 좋은 세상에 가서 살 수 있다면 가야지...'라고. 아들이 멀리 떠나는 것에 대한 한없는 아쉬움과 그리고 이민 가서 행복하게 잘 살라고 하는 격려의 뜻이 아버지의 짧은 말씀 속에 담겨 있었다. 그 말씀을 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목소리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야윌 대로 야위신 아버지의 몸은 한줄기 약한 바람에도 날아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회오리바람에 하늘을 나는 고추처럼 불같았던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힘없이 내뱉으신 그 말씀은 내가 얼굴을 마주하고 직접 들을 수 있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육성이 되고 말았다.


이제 아버지와 작별하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아버지 절 받으세요' 하고 큰절을 하기 위해 일어섰다.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시던 아버지가 모든 걸 체념하신 듯 얼굴을 떨구셨다. 의지했던 자식이 정녕 떠나는구나 하고 속으로 혼자 말씀하시는 듯한 표정이셨다. 이제 더 이상 곁에 붙잡아 놓을 수 없다고 체념하신 것 같기도 했다. 마룻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하며 마음속으로 '아버지, 불효자식 용서하세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머리를 들어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엎드려 절을 하는 동안 아버지가 뒤로 돌아앉아 계셨던 듯 몸을 돌려 고쳐 앉으시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가슴이 미어지듯 마음 아픈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아버지가 뒤로 돌아앉아 있을 때 흘렸던 눈물을 훔치고 계셨던 것이다. 내 어릴 때부터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눈물 흘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나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아버지에게는 눈물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없는 줄 알았던 내가 아버지에게도 눈물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는 순간이었다. 자식한테 마지막까지 눈물을 안보이시려고 내가 엎드려 절하는 사이 뒤로 돌아 앉기까지 하시면서 속으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 그렇게 속으로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비통하셨을까.  


대문 밖까지 나오셔서 나를 배웅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제발 마지막 뵙는 게 아니길 간절히 소망했다. 차 타는 곳까지 가기 위해 동네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연거푸 아버지를 뒤돌아 보았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아버지 모습은 더 이상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는 내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한참을 서서 내가 떠나가고 있는 쪽을 바라보고 계셨을 게다. 예전에 내가 고향에 들렀다가 떠날 때마다 늘 그렇게 하셨듯이 말이다.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세 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 세 시간이 무지하게 길게 느껴졌다. 차 창밖으로 보이는 낯익었던 고향길 풍경들마저 그날따라 한없이 쓸쓸하고 적적해 보였다. 


서울로 향하는 동안 눈물 훔치시던 아버지 모습이 단 한순간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그리고 젊은 시절 타오르는 불처럼 의욕과 자신감이 넘치고 호탕하고 정열적이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가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은 캐나다에 있는 가족과 재회하게 된다는 기대와 기쁨보다는 고향집에 혼자 계신 아버지를 두고 떠난다는 생각으로 착잡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게 그 밤은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마음은 나보다 훨씬 더 착잡하셨을 게다. 또한 아버지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셨을 게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한국의 모든 사람들과 이별을 했고 낯익고 익숙한 모든 것들과 작별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인천공항에서 밴쿠버행 비행기를 탔다.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떠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에 있는 큰 누이집 가까운 요양원으로 모셔졌다. 거기서 1년 여 지내시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열흘 부족한 1년 뒤 어머니가 계신 저승으로 가셨다. 세상을 떠나시기 얼마 전 동생이 아버지를 뵈러 갔다가 나하고 아버지 사이에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아버지가 들릴락 말락 하는 힘없는 목소리로 나한테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셨다.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라고. 평생 살아오신 집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게 전화상으로나마 내가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육성이었다. 고향집에서 아버지와 작별할 때 다시 뵐 수 있기를 그토록 소망했건만 나의 그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의 임종도 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이민을 왔기 때문이었다. 


오늘이 아버지의 20주기 제삿날이다. 한국에 가서 부모님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대신 기일이 되면 아내와 함께 조촐한 제사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낸다. 매년 제사를 지낼 때마다 마지막 이별을 할 때 아버지가 흘리셨던 눈물을 생각하게 된다. 그 짧은 이별의 순간 내가 평생 처음 보았던 아버지의 눈물은 세상 어느 누구의 눈물보다 뜨거운 눈물이었다. 그것은 또 아버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던 아들 사랑하는 마음이 표출된 것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20주기 제삿날도 그렇게 맞이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