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차라리 인생을 산을 오르는 일이라 말하고 싶다
당신이 왔던 길을 돌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앞이 꽉 막힌 느낌이 드는 지금,
당신 앞에 있는 그건 계단이 아니라 벽이다.
인생이 계단을 오르는 일이라면
흔히 인생을 계단을 오르는 일에 비유하곤 한다. 한 칸씩 계단을 오르듯 꾸준히 노력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인생의 고비를 뛰어넘은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끔 막막한 순간이 올 때면 이 말을 되새기며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도 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거라고.
오르고 올라야 할 수많은 계단들
인생에는 참 올라야 할 계단이 많다. 중학생 때는 '좋은 고등학교'라는 계단을 위해 내내 열심히 공부했다. 결국 자사고에 진학했지만, 이내 '좋은 대학교'라는 또 다른 계단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로라하는 아이들과 경쟁하며 버텨내야만 했던 고등학교 3년은 내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인생의 순간으로 남았다. 감사하게도 좋은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됐지만 '좋은 직장' 또는 '대학원'이라는 계단으로 오르기 위해 친구와의 약속을 미루고 높은 학점을 받기 위해 밤을 새워야만 했다.
이렇게 계단을 하나 오르면 또 다른 계단이, 그리고 또 다른 계단이 내 앞에 약속한 듯 펼쳐졌다. 어떤 계단은 조금 더 가팔랐고, 어떤 계단은 조금 더 높았다.
정신없이 계단을 오르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 뒤를 돌아본 적이 없구나. 계단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오르면 그만이니까.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심장을 쥐어짜듯 힘겨워도 멈출 수 없었다. 저기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이 눈앞에 계단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그러다 점점 눈앞이 흐려지더니 내가 서있는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잘 오르고 있는 건지 두려워 크게 소리 쳐봐도 겁에 질린 내 목소리만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이었다. 내가 올라온 계단은 이미 희뿌연 안개에 가려져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올 수 있었던 걸까.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수많은 실패담 속의 주인공이 될까 봐 무서웠다.
계단과 벽의 차이
한순간에 무기력에 사로잡힌 나는 다 오르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 벽이 계단이 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앞이 꽉 막힌 느낌이 드는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오름 직한 계단이 아니라 내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다. 지금껏 노력하면 오를 수 있을 거라 믿어왔던 계단들이 사실은 이처럼 커다란 벽이었을지 모른다. 수십수백 번의 도움닫기 끝에 어마어마한 상처를 안고 지나온 벽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힘들 때는 잠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땀을 식히며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가도 되지 않을까. 벽처럼 느껴질 만큼 큰 계단 사이에 갇혀있다면 당신이 서있는 이곳도 자칫 방심하면 굴러 떨어질 낭떠러지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이제 조금 쉬어가도 되지 않을까. 나는 아직 어느 계단참에 아주 잠깐 머무르며 숨을 고르는 중이라고.
인생이 산을 오르는 일이라면
어차피 인생이 오르막에 가깝다면 흔하디 흔한 또 다른 비유일 뿐이지만 차라리 나는 인생을 산을 오르는 일이라 말하고 싶다. 주말 아침, 초코바와 얼음물 한 병 챙겨 가벼운 옷차림으로 동네 뒷산을 홀가분하게 오르는 일이라 여기고 싶다. 오며 가며 마주치는 동네 이웃과 친구들, 어여쁜 산짐승과 지저귀는 새들, 이름 모를 들꽃 그리고 나무들과 함께 오르는 산길을 상상해본다.
피곤할 땐 정자에 잠시 앉아 달큰한 물로 목 축이며 우연히 만난 길동무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다시 쉬엄쉬엄 산을 올라도 된다. 정상에 올라 깃발을 꽂는다고 끝이 아니라 그 뒤에는 반드시 하산할 일도 남아있으니 너무 급히 올라 진을 빼놓아도, 조급히 내려가도 안 된다. 동네 뒷산이라고 우습게 보아서 정신없이 내려가다가는 자칫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한동안 후들거리는 다리를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적당한 걸음으로 쉬엄쉬엄 올라 조심히 내려가는 것이 바로 산길이다. 어쩔 수 없이 여유를 가지고 쉬어가야만 할 만큼 숨이 벅찰 때도 있으며,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해 도움을 받거나 목마르고 다친 이를 도와줄 일도 생길 것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꽃을 발견할 수도 있고, 멈추고 싶을 만큼 찬란한 풍경을 마주할 수도 있다.
인생이 계속해서 앞으로 내달리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내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