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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tle Latte 젠틀라떼 Dec 13. 2018

[퇴사일기 #9] 갑과 을이 아닌 파트너

갑을 모두 사람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갑과 을이 존재한다. 상황에 따라 바뀌는 관계도 있고 장기간 종속되는 관계도 있다. 때에 따라 병과 정도 존재한다. 회사에서 갑과 을이라 하면 협력사와의 관계인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갑질 문화도 대기업과 협력사 또는 가맹점주 간의 문제가 다수였다.


  기업의 홍보팀에서 일하다 보면 갑과 을을 동시에 경험한다. 주로 대행사나 외주제작사에게는 갑인 반면 기자에게는 을이다. 갑의 입장에서 일하면 편하다. 사내방송과 홍보영상을 담당하며 외주제작사와 오랜 시간 함께 일했다. 기획안이 통과되면 촬영과 편집을 제작사 PD와의 협업으로 진행했다. 영상제작에 있어서는 PD가 더 전문가였지만 내가 갑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프로젝트 과정에서 내 의견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었다. 사소하지만 내가 운전기사를 해야 하는 선배들과의 출장과 달리 외주제작사와의 출장에서는 뒷좌석에 앉아 마음 편히 자는 일도 가능했다. 이렇게 말하니 갑질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갑이라는 이유로 몸과 마음이 편한 상태에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반면 을의 입장에서는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갑은 업무를 리드할 수 있지만 을은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생긴다. 홍보팀의 경우 언론사 기자와의 관계가 그렇다. 시간이 흐르고 김영란법 도입 등의 영향으로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자는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갑이다. 정당한 취재요청도 버거운 경우가 있는데 무리한 협찬이나 사적인 요구를 해올 때는 참 난감하다. 돌이켜보면 회사에 불리한 기사를 게재한 후에 광고를 요청하는 건 예사고, 임직원을 위한 회사 소유 복지시설 이용을 요구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점심식사 배달 요청도 심심치 않게 생기는 일이었다. 물론 기자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져 출입처에 불합리한 요구를 하는 기자는 자체적으로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관계로 긍정적인 변화가 이뤄지고 있지만, 그래도 홍보팀 입장에서 기자는 여전히 어려운 갑 중의 갑이다.

  개인적으로 갑과 을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계약서 등에서 관계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하관계와 같은 부정적인 관계를 조성하기 때문이다. 갑은 을에게 함부로 해도 괜찮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회사와 회사 간의 계약관계를 자신과 협력사 직원 간의 관계로 잘못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은 특정 몰상식적인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갑과 을은 상하관계가 아닌 파트너다. 업무를 보다 효율적이고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힘을 합치는 협력자다. 갑과 을로 정의될지언정 어느 한쪽이 우위에 서지 않고 서로 동등한 입장에 있어야 한다. 서로 도움을 주며 신뢰를 형성하는 관계가 진정으로 건강한 갑과 을의 관계라 생각한다.

  대행사나 기자들과 업무를 하며 동반자적인 관계를 형성하고자 많은 신경을 썼다. 여건이 허락하는 내에서 합당한 비용을 지급할 수 있도록 예산담당자와 적극 조율했고, 내 의견을 충분히 밝히되 전문가인 PD나 작가들을 최대한 존중하고자 했다. 다소 무리한 일정이나 예산으로 일을 진행해야 할 때는 미팅이나 전화를 통해 사전에 충분히 양해를 구했다. 적절한 대우를 해야 나 역시 원하는 수준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을이라고 해서 항상 을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 시급하게 진행해야 할 일이 있는데 대행사의 스케줄이 이미 잡혀 있을 때는 내가 을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을이 중요한 사업 파트너가 될 수도 있고 나의 상사로 이직할 수도 있다. 어떤 상황이 생길지 모르는 만큼 평소에 상호 신뢰를 쌓아야 한다.

  언제나 갑인 기자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자는 항상 취재거리에 목마르다. 기자는 취재 아이템이 필요하고 홍보팀은 기사를 싣는 것을 원한다. 따라서 기자와 홍보팀의 관계는 갑과 을이 아닌 파트너다. 때문에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내는 보도자료나 취재요청 외에도 출입기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가 있다면 적극 공유하며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자 중에도 사명감과 능력이 있는 기자는 불합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서로 각자의 역할을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서로가 필요할 때는 진심으로 또한 합리적으로 도움을 주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 이상의 사익을 위한 요구나 불합리한 관계 조성은 서로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

 아직도 갑을 관계에 의한 부정적인 사건들이 자주 발생한다. 갑을 관계는 비단 회사 만이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에서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다만 갑과 을이라는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계속해서 바꿔나가야 한다. 갑을이라 명명할지언정 어떤 관계에서든 파트너십이 필요하다. 그래야 사회도 회사도 개인도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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