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끝에 잡지 않은 기회
S사에서는 홍보 커리어를 지속할 수 없겠다고 판단한 이후 경력직 채용공고를 살펴봤다. 그리고 약 6개월 간 방송사와 IT사, 엔터테인먼트사, 프로야구단 등 몇몇 기업의 면접을 봤다. 연이은 야근 속에서 면접을 보는 것도 힘들었지만 정작 가장 어려웠던 건 면접장까지 가는 일이었다. 보통 이직을 위해서는 2~3차례의 면접이 필요하다. 연차 사용이 자유로운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 짧은 기간 안에 2~3번의 휴가를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부서장이 휴가의 사유를 꼼꼼히 물어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면접이 2개 이상의 기업에서 동시에 진행된다면 어떤 핑계를 대고 면접을 보러 가야 할지 머리를 쥐어짜 낼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의심받지 않을 만한 사유를 대느라 곤혹스러웠던 적이 많았다.
면접이 오후에 잡히면 오전에는 보통 출근을 했었는데, 여름에는 이마저도 문제가 됐다. 회사에서는 하계 복장 간소화를 명분으로 재킷을 입지 않는 것은 물론 셔츠도 반팔로 규정했다. 본래 반팔 셔츠는 잘 입지 않았기에 긴팔을 입어도 상관없었지만 재킷을 입고 출근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출근길에 지하철역 락커에 들러 재킷을 보관했다가 면접 가는 길에 꺼내 입고는 했다. 한 번은 2시간의 외출을 허락받아 겨우겨우 면접을 보고 락커에 재킷을 보관한 뒤 회사로 돌아왔다. 사무실 자리에 앉아 거친 숨을 고르며 다시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이게 뭐하는 짓인가’라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 참 다이내믹한 면접 여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헤드헌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과장님, 축하드려요.”라는 멘트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역량 부족으로 탈락하기도 하고 연봉이 맞지 않아 협상이 결렬되기도 하던 끝에 IT기업인 H사에 최종 합격했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였고, 보안과 핀테크 등 여러 분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어 경력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직급은 과장이었고 연봉은 괜찮은 대우로 알려져 있던 S사보 다도 조금 더 높은 수준이었다. 헤드헌터 말로는 같은 연차 중 최고 대우라고 했다. H사 면접이 진행되던 중에 S사에는 이미 퇴사 의사를 밝혔다. H사에 떨어진다면 자연스럽게 백수가 되는 만큼 입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입사는 하지 않았다.
입사를 포기한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H사에 입사하더라도 다시 이직을 고민할 것 같았다. 면접 과정에서 이 회사는 나와 케미가 맞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면접을 보면서 회사에 대한 판단에 많은 부분 변화가 나타난다. 정말 가고 싶었던 회사에 실망을 할 수도 있고 전혀 관심 없던 회사에 흥미가 생기기도 한다. 나의 경우 큰 관심 없이 임했던 1차 면접에서는 H사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높아진 반면 최종면접과 그 이후에 호감이 반감되고 말았다. 면접을 진행한 CEO의 톤 앤 매너가 나와 맞지 않게 느껴졌고, 입사도 하기 전부터 워크숍 발표자료를 준비하라는 무리한 요구가 회사의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연봉협상 과정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고집을 마주했다(어쩌면 헤드헌터의 커뮤니케이션 문제일지 모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에 자세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결국 H사 입사 대신 백수 라이프를 선택했다.
가끔씩 H사를 입사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후회라기보다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증이다. H사 박과장이 아닌 무소속 백수를 선택한 퇴사 당시 백수생활의 기간을 6개월에서 1년 정도로 예상했다. 그런데 회사를 나와 자유로운 삶이 시작되고 보니 6개월은 너무나 짧았다. 1년 정도의 시간은 필요했다. 그 1년 동안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 이야기를 다음 편에서부터 하나씩 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