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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tle Latte 젠틀라떼 Dec 27. 2018

[퇴사일기 #11] 나는 누구인가

나를 알아야 나를 이긴다

  나는 누구인가. 퇴사 다음날, 초겨울의 찬 공기를 피해 들어간 카페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 적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일까. 어떤 사람이길래 많은 이들이 만류하는 백수의 길을 제 발로 찾아왔을까. 백수 시절을 어떻게 보내야 하며, 더 나아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까.” 퇴사 이후 한동안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글로 적었다.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것을 잘하고 어떤 것을 못하는지 등에 대해 떠올렸다. 한 순간에 정리될 질문은 아니었지만 꼭 생각해봐야 했다. 거창하게 말해보자면 30여 년의 인생을 돌아보고 미래를 그려보는 시간이었다. 메모지 위에는 대략 이런 내용들이 적혔다.

- 좋아하는 것 : 책을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글쓰기, 공연 관람(주로 콘서트나 뮤지컬)하기, 햇살 좋은 날 음악 들으며 걷기, 한강에서 조깅하기, 새로운 전자기기 써보기, 맥주나 와인 마시기, 여행하고 봉사하기, 요리하기, 지인들을 서로 연결해주기

- 싫어하는 것 : 가식적인 태도, 안하무인과 갑질, 권위의식, 담배냄새, 강권하는 술, 발전 없는 삶, 의미 없는 일

- 목표하는 삶 : 글을 쓰고 소통하며,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사고를 공유하고, 이를 통해 경제적 안정을 갖추고, 시간을 여유 있게 활용하며, 많은 이들과 더불어 나누는 삶

특별할 건 없었다. 남들과 차별화될 만큼 개성 있거나 특출 난 내용이 있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할 지에 대해 다시금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본 나를 아주 간략히 정리하자면, 책이나 공연, 영화와 같은 콘텐츠를 즐기고 사람을 좋아하고 글을 제법 쓸 줄 아는 사람이다. 이와 관련한 일을 통해 즐거움과 경제적 안정을 동시에 얻고, 가능한 선에서 나눔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초등학교(아재력을 뽐내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 나는 마지막 국민학교 졸업생이다) 시절부터 신문과 라디오를 좋아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는데, 학교가 끝나면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양복점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가게 중간에 있던 테이블에는 항상 신문이 놓여있었다. 양복점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기에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신문 기사를 매일 꼼꼼히 읽었다. 다만 정치보다는 스포츠나 연예기사가 좋았기에 신문을 항상 뒤에서부터 거꾸로 읽었다. 프로야구팀 한화 이글스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절부터다. 한화의 전신이었던 빙그레 이글스가 당시 강팀이었고, 장종훈의 홈런 소식이 연일 신문 스포츠면의 탑을 장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는 포항 스틸러스, 배구는 고려증권(아쉽게도 해체했다), 농구는 기아자동차(현 모비스)를 응원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어린 마음에는 잘하는 팀이 최고였다.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주말이면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들었다. 음악을 무료로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좋은 노래가 나오면 녹음해서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누나에게 보내주곤 했다. 자연스럽게 사연도 종종 보냈는데 심심치 않게 선물을 받았다. 헤어드라이기나 컴퓨터용품, 도서상품권은 물론 당시엔 지금보다 훨씬 고가였던 데스크탑 컴퓨터도 선물로 받았다. 고등학생 때는 딱히 끌리는 서클이 없어 문예창작반에 가입했는데 별생각 없이 쓴 글로 담당 선생님께 크게 칭찬받은 적이 몇 번 있었다. 글을 쓰고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이래저래 선물도 받고 칭찬도 들었던 걸 보면 글재주는 조금 있었다.


  신문과 라디오를 좋아했던 나는 기자가 되기를 꿈꿨다. 눈과 귀를 떼지 못했던 그 지면과 방송에 내가 직접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좋았고, 기자처럼 취재를 하고 어설프게나마 신문과 방송을 만들어보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그렇게 언론인을 향해 가는 길에는 막힘이 없었다. 매우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하지만 복학생이 된 이후 여러 대외활동을 접하면서 변화가 생겼다. 경제경영 연합동아리에서 다양한 전공의 친구들을 만나 내가 모르던 세상과 직업군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면서 기자나 라디오 PD 외의 직업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다. 사실 그즈음 행정고시를 살짝 준비해본 적도 있었다. 이미 고시공부를 하고 있던 큰누나의 제안으로 시작했었는데 공부를 해도 재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고시공부가 재미로 하는 것이겠냐마는, 목표의식이 불확실하고 절실하지 않아 열정을 쏟지 못했다. 연합동아리에 이어 웹진 기자와 기업 홍보대사 활동도 했다. 이 과정에서 기자와 기업의 중간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조율하는 홍보팀 실무자들을 만나 그 분야의 매력을 느꼈고, 이때의 경험이 현재까지 내 커리어를 결정했다.


  이후 10년의 직장생활을 거친 나는 미래가 불투명한 30대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진 것이 많지 않고 회사는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타입도 아니다. 막연한 희망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매우 불안정해 보일 수 있으나 사실이다. 하지만 결코 나쁘다고는 할 수도 없다. 분명 만족할 만한 부분이 더 큰 삶이고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면서 괜찮은 월급을 받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소비를 하고 연중 한 두 차례의 해외여행도 하고(그래서 돈을 많이 못 모으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기부도 꾸준히 하고 있다. 이상적이지는 않아도 목표하는 삶의 절반 이상은 흉내라도 내고 있다. 조금씩 꾸준히 시도하다 보면 머지않아 대부분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더불어 더 큰 목표를 세워야 하는 걸까라는 질문도 던지면서 잘 살아가고 있다.


  TMI처럼 개인적인 스토리가 길어졌만, 중요한 건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하고 생각을 정리해봐야 한다. 그래야 인생의 방향이 잡히고 나를 발전시켜야 할 부분에 집중할 수 있다. 이런 질문을 해보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또, 잠깐 생각이 들더라도 이를 글로 적어보는 사람들은 드물다. 직접 손으로 써보면 생각이 더욱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일주일에 한 번,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상황에서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진중하게 생각을 정리해봤으면 한다. 살다 보면 여러 풍랑을 만나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했던 시간들이 버팀목이 되어준다. 그 버팀목이 있어야 우리는 스스로를 이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이 질문을 지금 이 순간 모두가 자신에게 던져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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