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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tle Latte 젠틀라떼 Jan 18. 2019

[퇴사일기 #16] 살림하는 남자

집안은 남자하기 나름

  올해로 자취 18년 차를 맞았다. 스무 살에 서울로 올라와 누나 2명과 함께 자취를 시작했고, 큰누나가 시집을 간 이후 둘째 누나와 10년 넘게 동거 중이다. 둘 다 직장인일 때는 집안일에 신경 쓰기가 어려웠다. 평일에는 집에서 밥 한 끼 먹지 않는 날이 많았고, 주말에도 서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다 보니 빨래나 청소를 분담해서 하는 정도였다.

  퇴사를 하면서 집안 살림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일찍 분주하게 집을 나서지 않아도 됐고, 종일 집에 머무르는 날도 생기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복잡한 집기들을 정리하고, 냉장고를 청소하고, 인테리어를 바꿔보는 등 집안을 하나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생활하는 공간이 정돈되니 기분도 좋아지고 하는 일에도 집중이 잘 됐다.

  그리고 아침을 꼭 챙겨 먹었다. 일찍 일어나 누나가 출근 준비를 하는 사이에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부담스럽지 않고 빨리 먹을 수 있도록 샌드위치나 샐러드 위주로 준비했고, 가끔 공을 들여 연어 스테이크와 같은 특식도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아침을 차려준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때로는 누나가 아침을 먹지 못하고 출근하는 날이 있었다. 나 역시도 학생 때나 가끔 어머니께서 서울에 올라오셨을 때 차려주신 아침을 못 먹고 나갈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속상해하시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정성을 생각해 평소보다 과식을 하더라도 어머니가 차려주신 음식은 꼭 다 먹으려고 한다.

  퇴사를 하면 시간이 참 많아진다. 직장인일 때는 그렇게 소중했던 여유가 일상이 된다. 그 자체로 행복하다.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다.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 선물이 되지만, 그럭저럭 흘려보내면 가치가 퇴색된다. 모든 시간을 열정적으로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의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멍 하게 있는 시간조차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다만 되도록이면 많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의미 있게 사용했으면 한다. 나 자신도 부족했던 부분이기에 지금 퇴사했거나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집안일을 챙긴 것은 게을러지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지 않다 보니 당연히 게을러질 수밖에 없었다. 퇴사 초기에는 오전 내내 잠을 자는 경우도 있었다. 고생한 나를 위한 보상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했었다. 물론 회사를 다니며 피로해진 몸을 회복하기 위해 수면시간을 늘리는 것은 좋다. 의학적으로도 7~8시간을 자야 건강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게을러지면 곤란하다. 기상시간이 늦어지면 오전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가 매우 어렵다. 일찍 기상하면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그래서 퇴사를 하더라도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한다. 인생에는 적당한 루틴이 필요하다.


  게을러지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집안일을 선택한 데에도 이유가 있다. 내가 생활하는 공간이 나를 가장 잘 투영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더라도, 퇴사 후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을 잘 관리해야 나 자신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복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살고 싶어 한다. 미니멀리즘에 가깝다. 물욕도 많지 않다. 해외여행을 가면서 면세쇼핑을 거의 해본 적 없고, 자동차는 10년 넘게 타고 있으며, 명품엔 그리 관심이 없다. 무엇을 소유하는지보다 얼마나 합리적이고 깨끗하게 잘 사용하는지에 관심이 많은 타입이다. 그래서 집안일에서 가장 신경 쓴 것이 공간을 복잡하게 어지럽히거나 굳이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과감히 정리하는 것이었다. 


  직장에 다니며 자취를 하는 남자가 집안일을 챙기는 건 쉽지도, 흔한 일도 아니다. 나 역시 다시 직장생활을 하는 지금은 집에서 아침을 잘 챙겨 먹지 못한다. 그러나 밥은 못 먹더라도 공간을 심플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은 계속하고 있다. 집안일도 결국 자기관리다. 완벽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스타일을 반영해 정리하고 가꿀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다면, 만약 퇴사를 해서 시간의 여유가 많이 생겼다면, 집안 살림을 하나씩 챙겨보는 습관을 가져보는 것을 추천한다.

  여담을 덧붙이자면, 어머니께서 종종 말씀하신다. "너는 살림을 해봐서 나중에 와이프가 서투르면 스트레스 줄 거 같아"라고. 그저 웃고 말았지만 말씀드리고 싶다. "그냥 제가 하면 되죠 뭐. 그리고 사랑하는데 못하는 게 있으면 어때요. 어머니 아들 보기보다 사랑꾼에 성격도 괜찮아요." (어머니 너무 늦지 않게 꼭 결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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