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entle Latte 젠틀라떼 Dec 04. 2018

[퇴사일기 #4] 현장에 답이 있다

실제로 보고 듣는 것이 진짜다

  현장에 답이 있다. 수십 년 전 경영서에도 등장했을 법한 뻔한 말이다. 그만큼 정답이다. 건설회사라면 건설현장을, 식품회사라면 대형마트를, 언론사의 경우라면 정부기관과 기업은 물론 국내외의 모든 사건사고 발생장소가 현장이다. IT나 플랫폼 회사는 현장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고객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모든 공간이라 정의한다면 그 범위가 훨씬 넓어진다. 회사가 생산하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탄생을 거쳐 유통, 소비되는 모든 과정이 현장에 있다. 그래서 현장에 가야 회사의 실제를 가장 잘 알 수 있다. 보고서나 ERP로는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고, 같은 사실도 피부로 느껴지는 게 다르다. 현장에서 느끼는 것이 진짜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많은 기사들 가운데 현장에 가서 취재한 기사는 한눈에 다르다.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껴 쓰지 않고 기자가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한 바를 쓰기 때문이다.

  K사에 재직할 당시 수많은 현장을 다녔다. 지사와 현장이 전국에 퍼져있어 현장의 모습을 담은 홍보물을 만들기 위해 말 그대로 전국을 누볐다. 고속도로를 지나간 것까지 따진다면 전국의 도시 가운데 안 가본 곳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다. 심지어 국토 최서단 격인 백령도와 동서단인 울릉도와 독도, 최남단인 마라도도 모두 방문했다. 여행이 아닌 출장이었지만 살면서 쉽게 방문하기 어려운 곳을 가본다는 점에서 좋은 경험이었다. 백령도를 향하는 쾌속선에서의 멀미는 아찔했지만 북녘땅을 희미하게나마 바라볼 때의 애틋한 마음은 고생을 잊게 만들었다. 높은 파도로 인해 복귀가 하루 늦어졌던 울릉도에서는 아직 때 타지 않은 자연 속에서 잠시나마 힐링을 할 수 있었고, 독도경비대에 성금을 전달하고자 독도에 발을 내디뎠던 순간에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라도에선 예상보다 훨씬 많은 짜장면집을 보고 놀랐는데 뱃시간을 맞추느라 먹지 못하고 돌아와 무척 아쉬웠다.

  현장에 가면 다른 직군의 업무와 일상, 그리고 노고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특히 수 십 미터 높이의 송전철탑이나 지하 수 십 미터 깊이의 전력구를 일상처럼 오르내리는 직원들을 만날 때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 번은 기술직에서 흔치 않은 여자 신입사원을 만났다. 익숙치 않은 운전실력으로 시골 구석구석에 있는 설비를 점검하고 민원도 챙기는 모습이 당차 보였다. 업무는 적응해가고 있지만 지방근무에 외로움을 느낀다는 말에 사내연애를 추천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알고 보니 당시에 이미 옆자리 동료와 연애 중이었던 것이다. 그 직원처럼 젊은 나이에 연고가 없는 지역에서 홀로 지낸다는 것은 업무 외적으로 견뎌내야 할 만만치 않은 무게였다. 그래서인지 회사에는 사내커플이나 첫 발령지에서 배우자를 소개받은 경우가 꽤나 많았다.

  해외에서도 인상적인 순간들이 있었다. 카자흐스탄을 갔을 때였다. 러시아 남부에 위치해 있어 추운 지역인데 설상가상으로 12월에 출장을 갔다. 단단히 대비를 했지만 중앙아시아의 칼바람은 한국과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더욱이 현장이 있는 곳은 건물이 드문 평지 한가운데였다. 야외에서 현장 곳곳을 둘러보는 동안 거친 눈바람을 그대로 마주했다. 눈이 머리와 어깨에 한가득 쌓여 한때 이슈였던 ‘박대기 기자’를 연상케 했다. 추운 몸을 녹이고 달러를 현지화인 텡게(Tenge)로 환전도 할 겸 은행을 찾았는데 문을 열자마자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는 것을 느꼈다. 이유 모를 민망함과 약간의 무서움을 느꼈다. 넓게 보면 같은 아시아권이고 카자흐스탄 내에 고려인들도 상당수 있는데 내가 그렇게 달라 보였나 싶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온 몸을 아웃도어 제품으로 풀장착하고 시내에 등장한 외지인이 그들에게는 생소했던 것 같다. 카자흐스탄 최고봉을 정복하러 온 전문 산악인쯤으로 보지 않았을까.

  반대로 중동에 위치한 요르단은 사막의 나라였다. 목적지인 발전소는 수도 암만에서 차로 1시간 여를 달려야 하는 외곽에 있었는데, 끝없이 펼쳐진 모래땅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목이 말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푸른 산과 들판이 있는 우리나라의 자연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요르단에서 가장 신선했던 건 사막이 아닌 밤문화였다. 암만의 번화가인 레인보우 스트리트에 가면 각자 병을 들고 건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다만 특이하게도 사람들이 손에 든 건 술이 아니라 콜라였다. 이슬람은 술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펩시와 코카콜라의 화려한 네온사인을 배경으로 흥이 충만해진 요르단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소중한 인연들도 만났다. 첫 해외 출장지였던 필리핀 세부에서였다. 세부공항에 밤늦은 시간에 도착해 다음날 업무를 소화하고 밤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현지 체류를 기준으로 약 24시간의 일정이었기에 휴양지의 분위기는 느껴볼 틈조차 없었다. 하루 종일 이어진 빠듯한 업무와 더위에 지친 마음은 현지 사람들의 친절로 풀렸다. 세부 주정부에서 마련한 만찬에 참석했는데 같은 테이블에 앉은 공무원들이 말도 먼저 건네주고 배지도 선물하며 환대해줬다.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가까워져 친구가 됐고 지금까지도 SNS로 소식을 전하고 있다.

  국내외 출장지에서의 가벼운 추억들을 몇 가지 나열했지만, 이러한 경험들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순간들은 여러 업무 일정 가운데 일부에 불과했다. 공사현장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한여름의 강한 태양 아래서 몇 시간을 버티거나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쳐가며 산을 오르는 일이 더 많았다. 교통사고를 당해 한 달간 통원치료를 받은 적도 있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쉽지 않아 출장은 결코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사무실에서보다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기에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고 생각했을 뿐이다. 수십 페이지짜리 사업보고서로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기술이나 사업모델일지라도 현장 담당자에게 설명을 듣고 나면 금방 이해가 되곤 했다.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나 국가에 대한 정보도 인터넷 검색이 아닌 직접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정확히 봐야 사내 직원들은 물론 기자와 같은 외부인들에게도 제대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장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한 번 다녀온 현장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문서로만 접했다면 기억이 오래가지 않았을뿐더러 정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현장을 잘 이해할수록 좋은 홍보 컨텐츠가 만들어진 것도 당연한 사실이다. 현재는 재직 중이지 않지만 당시 회사와 사업에 대해 누군가가 물으면 지금도 전반적으로 이해를 돕는 수준에서는 충분히 설명을 해줄 수 있다. 홍보요원으로서는 현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나와 K사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자산이다.

  업무적인 성장 외에 사내 네트워크도 강화할 수 있었다. 시스템이 아무리 발전해도 중요한 결정이나 커뮤니케이션은 사람이 한다. 그래서 관계, 즉 네트워크가 중요하다. 출장은 전국의 지사나 해외법인에서 일하고 있는 동료들과 안면을 트고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본사에 근무하면서 지사나 해외법인에 자료 요청을 할 경우가 많았는데, 담당자와 전화 통화만 할 때보다 직접 만나고 나면 업무협조가 훨씬 원활하게 이뤄졌다. 또한 순환근무 제도가 있어 출장에서 만난 동료가 본사 내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아오면 해당 사업부에 대한 자료 요청이나 정보 파악도 보다 수월했다. 회사를 벗어나 인간적으로도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훌륭한 동료들이 생겼고 회사생활 내내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장을 돌며 자연스럽게 네트워크를 넓힐 수 있었던 점은 운이 좋았다.

  이처럼 사업현장을 가보는 건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얻는 것이 크다. 그래서 동료나 후배들에게 가능하면 현장을 많이 가보라고 말한다. 사무실에 앉아 사업개요를 읽고 사진을 보고 예상실적을 파악해봐야 담당 실무자가 만들어낸 데이터에 불과하다. 잘못 판단했거나 과장되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보고서 작성 역량이 부족해 누락하거나 실수로 기재한 사실들이 있을 수도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직접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다음 직장이었던 S사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가 현장과 멀어진 것이었다. 회사의 전체 실적을 관리하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에서 보고서만 내리 작성했을 뿐 현장에 가본 경험은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10년 넘게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사업장이어서 새롭게 파악하거나 배워 올 것이 별로 없었다. 현장을 모르고서는 프로젝트의 이슈를 파악하는 눈을 키우기가 어려웠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직무나 업무량, 상사의 성향 등에 따라 현장에 가 볼 기회가 자주 주어질 수도 있고 아예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최대한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경험하는 만큼 시야가 넓어진다. 흔히 하는 말로 인사이트가 생긴다.


꼭 기억해야 한다. “사무실 안은 편하다. 그렇지만 성장은 느리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일기 #3] 야근은 이별을 싣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