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만큼은 일하는 것이 프로
관공서에 민원전화를 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일이 있다. 힘들게 자초지종을 다 설명하고 났더니 “담당자한테 돌려드릴게요”라는 말과 함께 전화연결음이 들려온다. 한 번이면 족한데 두세 번 이런 과정을 겪고 나면 온갖 짜증이 몰려온다.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으면서…”라는 투정으로 화를 삭힐 수밖에 없다. 물론 업무마다 담당자가 지정되어 있기에 담당자와 통화하면 민원을 더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다. 만약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도 책임소재를 명확하게 가릴 수 있다. 하지만 굳이 담당자가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사안도 있다. 그럴 땐 공무원이 일을 회피한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일을 회피하는 사람은 어느 조직에나 존재한다. 내가 속했던 회사에도 있었고, 친구가 일하는 회사에도, 회사를 욕하는 어느 블로그 포스팅 안에도 있었다. 그들은 왜 일을 피하는 걸까. 분명 신입사원 시절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텐데 무엇이 사람을 바꿔놓았을까. 열심히 일했지만 보상이 따라주지 않자 의욕을 잃었을 수도 있고, 직무가 본인의 희망이나 성격과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회사를 다니는 자체가 싫을 수도 있다. 여러 가정이 가능하지만, 사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부분들까지 애써 이해하고 포용할 정도로 직장인들은 한가하지 않다. 그런 사람들과 업무로 엮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일을 피하는 사람들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깊이 없는 자의적 분석이다). 첫 번째는 본인 일만 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업무분장을 사규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한다. 업무분장에 명시된 일 외에는 절대 발을 담그지 않는다. 또한 평소 하던 대로 일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팀장이나 동료가 업무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여러 부득이한 상황을 핑계 삼아 일단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같은 부서라도 옆자리 동료의 업무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두 번째는 본인 일도 제대로 안 하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월급도둑이다. 보고서는 기한을 넘기기 일쑤인 데다 완성도도 떨어질 때가 많다.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면 변명과 불만이 쏟아진다. 자리도 자주 비운다. 부하직원이라도 있으면 업무를 하나씩 하나씩 아래로 토스한다. 회사 입장에선 당장이라도 해고해야 할 케이스다. 세 번째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이미 일이 많은 사람이다. 회사에서는 능력 있고 성실한 이들에게 더 많은 업무를 맡기고자 한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 업무 욕심도 있어 남들보다 많은 양의 업무를 맡게 된다. 여기까지는 좋지만 회사는 그리 공평하거나 자비하지 못하다. 일이 많다고 배려해주지 않는다. 잘하는 사람에게 계속 일을 줄 뿐이다. 그러면 이미 맡은 역할이 많기 때문에 추가적인 일을 피하고자 할 수밖에 없다. 회사 입장에서는 소중한 인재겠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매우 안쓰러운 유형이다. 일은 일대로 하고 스트레스는 가장 많이 받는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위의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모두 만나게 된다. 다양한 목적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이를 인정하지만, 각각의 유형마다 마인드를 조금씩만 바꾸면 보다 즐거운 일터, 나아가 회사와 개인이 함께 성장하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든다.
먼저, 본인 일만 하는 사람들은 업무를 보다 넓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평생 한 가지 업무만 하는 경우는 드물다. 또, 어떤 업무를 하든 다방면에 걸친 지식이나 경험이 요구되는 때가 많다. 평소 동료의 일이나 다른 직무에도 관심을 갖고 이해를 넓혀놓으면 활용할 기회가 분명히 찾아온다. 동료가 힘들 때 도움을 주면 반대로 내가 업무에 치일 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때로는 협업도 필요하고 서포트도 필요하다. 그래서 조직을 갖춰 일하는 것이다. 지금껏 업무분장에 기재된 일만 해왔다면, 앞으로는 그 외의 일이라고 무작정 피하기보다는 자신과 동료, 부서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를 한 번쯤 고민해보았으면 한다.
다음으로 본인 일도 제대로 안 하는 사람들은 프로의식을 가져야 한다. 회사원은 돈을 받고 일하는 프로다. 회사가 적지 않은 지출을 하며 고용을 하는 것은 그 이상의 가치를 얻고자 함이다. 그런데도 최소한의 역할조차 하지 않는 것은 회사와 동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다. 정년이 보장된 K사에서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꽤 있었다. 승진을 포기한 채 실무는 젊은 직원들에게 떠맡기고 사적인 일에 몰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나도 운이 없게 그런 인물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 방만경영이라는 시선이 억울할 정도로 밤낮없이 일하는 직원들의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지는 대상이었다. 지금까지도 그 사람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제발 월급 받은 만큼이라도 일을 하세요’다. 회사는 아마추어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연봉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프로가 되어야 한다.
반면 객관적으로 이미 일이 많은 사람은 다소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 기계도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이 정해져 있는데 인간인 우리가 무한정 일을 할 수는 없다. 업무량을 알아서 조절해야 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회사나 상사는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일하기 좋은 회사라도 이익이 우선이고, 합리적인 상사도 결국 개인이 우선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실이다. 회사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나 자신을 뒷전으로 미뤄서는 안 된다. 회사가 내 건강과 행복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K사에 재직할 때 출장을 과하게 많이 다닌 시기가 있었다. 아침 일찍 부산에 내려갔다가 밤에 광주로 이동하고, 서울로 돌아와 하루 출근 한 뒤 다음날 강원도를 가는 식의 빡빡한 스케줄이 이어졌다. 젊은 남직원이라는 이유로 동료들이 꺼리는 출장까지 도맡아 다니다 보니 버티기가 어려웠다. 고민 끝에 문제를 제기하고 지역별 출장담당을 지정하는 등의 방안으로 조정을 했다. 그러고 나서야 회사 밖에서의 나를 조금씩 찾을 수 있었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일을 많이 맡는 사람들 중에는 마음이 약한 경우가 많다. 회사에서 추가적인 일을 요구했을 때 난색을 표해도 끈질기게 설득하면 결국 받아들인다. 나 역시도 그랬다. 회사도 그걸 알기에 일을 계속 주는 것이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이기적이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 적당히 거절하고 조율하는 연습도 필요하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 최상의 결과를 내고, 동료들과 서로 배려하며 적극적으로 협업하는 직원들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일의 분배를 합리적으로 하면서 직원들의 Work & Life Balance까지 완벽하게 챙기는 리더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쉽게도 현실에선 찾기 어렵지만, 나 자신이 그런 사람에 가까워질 수는 있다. 그 시작은 혹시 나도 일을 회피하는 사람은 아닌지, 내가 속한 조직에서 일의 분배가 합리적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잘 살펴보는 것이다. 그동안 일을 피해왔다면 최소한 맡은 업무는 완벽하게 처리하고자 노력하고, 과부하가 걸리는 동료들은 없는지 주변을 챙기는 배려의 시선을 가졌면 한다. 직장생활을 하는 모두는 프로다. 프로는 적어도 받은 만큼은 일을 하고 성과를 내야 한다. 이 사실을 모두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